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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Feb 07. 2020

결혼기념일 선물이 고민된다면

이 표 하나면 걱정 없어요

예전 전남편과 때는 결혼기념일에 선물을 받지 않으면 억울했다. 뭔가 것을 보너스처럼 받아내야 하는 노예의 마음 상태였던 같다. 이혼을 후에도 오랫동안 결혼기념일을 기억해 것은 예복을 샀던 브랜드였다. 이혼 지가 오랜지였는데 회사에 남겨놓았던 회원가입 전화번호로 결혼기념일 축하 문자가 왔다. 그때마다 피식 웃으며 쓸쓸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이 결혼기념일이었다. 남편은 개강 전에 미국의 자기 고향집에 2주간 다녀오기로 하고 떠난 상태이다. 재혼 후, 다섯 번째로 맞는 기념일 아침에 남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침대 옆 선반 까만색 상자 밑에 뭔가를 두고 왔으니 보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뭘 준비했을까 보물 찾기를 하는 설레는 심정으로 찾았다.


그것은 A4에 3장을 앞뒤로 빼곡히 타이핑을 한 편지였다. 느낌이 불길하다. 결혼기념일에 이렇게 장문의 편지로 쓸 말이 좋은 얘기일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뒷 목이 서늘해져서 읽어내려갔다. 구구절절 나를 씹는 얘기인데, 이는 방법도 어찌나 예의 바른 지 기분 나빠야 할 대목이 헷갈렸다. 평소에 나에게 하던 얘기들인데 내가 안 고치니 심각하게 좀 받아들이라는 경고성 편지였다.


남편이 마블 영화나 액션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한다. 같은 영화를 몇 번이나 보는 남편에게 내가 말을 했다. 이렇게 폭력적인 영화를 자꾸 보는 것은 분명히 분노나 스트레스를 무의식 속에 감추고 있어서 그런 같다고. 그랬더니 남편은 그냥 오락 영화를 즐거우려고 보는 것이니 분석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의 '무의식'은 괜찮으니 자기가 말한 '의식의 세계'에 신경을 좀 써 달라고 했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것, 설거지나 청소를 꼼꼼하게 해 달라는 게 남편이 요구한 '의식 세계'였다.


결혼기념일에 받은 선물치고는 참 잔인했다. 조목조목 어찌나 논리가 정연한지,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전화를 자주 안 한 것은 자기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연락이 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을 주었다고 했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 자기가 한참을 찾게 만든 것은 자기를 분히 존중하지 않은 것이라 여겨졌다고 한다.


수업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고 불평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 이해를 못해주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이런 모든 얘기들을 문단을 나누고, 요지는 볼드체로 밑 줄까지 쳐가며 논문 쓰듯이 했다.


대부분의 한국 남편들이 아내가 힘들다고 얘기를 하면 뭐가 그렇게 힘든지 이해를 못한다고 한다. 내가 딱 그 심정이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사람을 힘들게 하고 무심한 사람인가 싶어 억울했지만, 어쩌랴, 그렇다는데.


'나 답게 사는 것'에 너무 몰입하다 남편을 너무 몰라줬나 폭풍 반성을 하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긴 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You don't love me anymore."라고. 남편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답을 보내왔다. 이혼당할 위기는 넘긴 것 같은데, 이제 진짜 남편 말 좀 잘 들어야겠다.



결혼기념일마다 전통적인 선물이 있다는 걸 두 번째 기념일에 알게 되었다.  


남편이 아침부터 서울에서 누구를 만난다고 갔다. 저녁에 퇴근을 해 보니 침대 위에 선물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서울의 문방구 몇 개를 돌아다녀서 면 100% 종이를 사 온 것이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수채화 종이를 사 온 것이 생뚱맞기도 하고 귀여웠다.


첫 결혼기념일에 '유부녀'스러운 반지를 사 와서 기념일마다 보석을 사 주려나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 기념일에 종이를 사다 줘서 의아해했다. 남편이 횟수마다 적합한 전통적인 선물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종이로 만들어진 것, 두 번째는 면으로 된 것, 세 번째는 가죽으로 된 것. 이렇게 조금씩 단단하고 귀한 것으로 쭉 나가다가 60주년에는 다이아몬드가 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합쳐서 면으로 된 종이를 사느라 서울까지 갔다는 남편이 고마웠다. 나중에 이 종이를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어서 지역 도서관에서 하는 수채화 수업을 한 학기 동안 등록을 했다.


면 100% 수채화 용지



결혼기념일마다 정해진 선물이 있다는 것, 서양 젊은이들잘 모른다고 한다. 남편의 젊은 친척들에게 물어보니 처음 들었다고 했다. 남편의 연세가 있다 보니 전통적인 습관들을 고수하는 편이다. 세 번째 기념일에는 가죽 신발을 사 주었고, 올해는 나무로 된 뭔가를 주문해 놓았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선물 리스트이다 보니, 이 리스트대로 선물했다가는 배우자를 실망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의미를 잘 부여해서 전통이라 우기는 방법이 있다. 다른 하나는 현대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리스트가 있으니 참고해서 아이디어를 얻으면 될 것 같다.


에 검색하면 각 선물에 맞는 꽃이나, 색깔도 있고 대체 선물 아이디어도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혼기념일이 진심으로 기념하고 고마운 날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올해 결혼기념일은 남편의 A4용지 6페이지에 해당되는 아픈 편지로 기념했다. 각종 철학 책을 읽고 심리학 책을 읽었지만 그걸 왜 자기한테는 적용하지 않느냐는 남편의 편지를 받은 해이다. 나무로 된 뭔가를  기대 했는데, 나무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이러다 이혼 당하는 거 아닌가 싶어 화들짝 놀랐다.










남편이 사준 종이로 수채화 반에서 처음 그린 그림이다. 누군가 남편에게, 어느 나라가 살기 좋으냐고 물었다. 남편은, 어느 나라나 별로 상관없다고 하면서 나와 함께면 그곳이 집이라고 했다. "She is my home."이라면서.


질문을 한 사람이나 옆에서 듣던 나나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 그림을 그리고 붙인 제목이 "She is my home"이다. 집이 집 같지 않고 불편했다니 집수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남편의 연세가 있어 갱년기가 건지 내가 남편을 제대로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무심했을 수도 다. 내가 종합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알았다. 이제 연세 많은 남편에게 효도하는 심정으로 살아야겠다.

She is my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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