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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Mar 10. 2020

머리에 꽃을 꽂고 나가고 싶은 날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바비 인형을 가졌다. 종이 인형을 그리고 오려서 놀다가, 입체감이 있는 옷을 만들고 싶어 엄마에게 졸랐다. 6학년이란 나이는 있던 인형도 버릴 시기인데 바비 인형을 사달라고 하니 엄마는 안된다고 자르셨다. 몇 주를 졸라 드디어 인형을 가진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온갖 자투리 천과 단추, 레이스를 모으기 시작했다. 보온메리 내의가 들어 있던 상자에 온갖 바느질 재료들을 보관했다. 양말 목에서 자른 고무밴드에 레이스를 꿰매서 드레스를 만들고 작은 단추로 인형의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다. 꽃무늬가 있는 원단에서 꽃 모양을 오려 인형 옷에 붙이기도 했다.


나의 꽃사랑은 이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엄마가 이불 홑청을 시치면, 이불 목단 꽃 사이로 나도 모르게 뛰어들어 감탄을 하며 뒹굴었다.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로 꽃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나 천연 염색을 한 원단들은 자투리 하나도 버리기 아까워 모아 두었다가 꽃을 만든다. 옷이나 머리에도 꽃을 달기도 하는데, 같은 원단으로 만든 옷이나 옷을 만들어 준 고객과 얽힌 사연을 두고두고 기념하는 방법이었다.



단추, 지퍼도 버리지 못해 모았다가 꽃으로 부활 - 2012 사진



바느질을 할 때도 온갖 꽃을 만들어 머리에 달고, 반지로 만들어 끼기도 했다.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다 보니 머리에 꽃이라도 꽂고 나름의 꽃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 안에 제대로 미친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큰 꽃을 머리에 달고 싶을 수가 없었다.


옷에도 늘 꽃 그림을 그려서 입었고 커튼이나 베개 커버에도 꽃만 줄곧 그려대고 있다. 가끔은 내가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2011 사진, 머리에 손에 심지어 치마에도 꽃을 그려 넣었으니 많이 미치고 싶었나 보다




집이나 공방이나 늘 꽃을 두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철에 맞는 나무줄기나 초록 잎을 뒷산에서 꺾어오고 꽃을 몇 송이 사서 꽂아 두면 볼 때마다 흐뭇하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 마냥 꽃들이 내게 재롱을 떨어 주는 듯하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 산수유 가지를 꺾어 차에 싣고 출근을 했다. 산수유꽃 몽우리가 맺혀 있던 가지를 차에 던져 놓은 채 엄마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의 발에는 아직도 온기가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평온하게 잠이 들어,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사흘간의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차 뒤에 있던 산수유 가지를 보았다. 차 안에서 물기도 없었건만 몽우리가 터져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저 꽃가지를 꺾을 때 만해도 엄마는 병원에서 살아 있었고, 나는 평화롭게 꽃꽂이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불과 사흘 만에 나는 엄마도 없고 남편도 없는 불쌍한 이혼녀가 되어 있었다. 내 속도 모르고 산수유 꽃은 몽우리를 터트려 피고 있으니 야속해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산수유 가지를 버리지 못해 한참 동안 집에다 꽂아 두었다.



2011년 사진 , 산수유는 더디게 피어 계절을 알려준다





10년 전 3월 초, 눈발이 날리던 날 엄마는 밭 위에 만든 가족 묘지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엄마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맘 때가 되면 산수유 꽃을 꽂아 나만의 의례를 치른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집 앞의 산수유나무들은 해마다 예쁘게 꽃을 피우며 나에게 엄마를 기억나게 해 주었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살면서 엄마의 제사에도 잘 못 가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를 기억하고 추모한다. 엄마를 기억할 만한 영화나 책을 읽으며 실컷 울어 주는 일이다. 얼마 전에는 영화 <작은 아씨들>을보며 엄마를 위한 추모의 눈물을 흘렸다. 영화는 자매들을 위한 영화인데, 내게는 엄마의 역할이 눈에 들어와 나를 울렸다.


딸과 김치를 담그고 잡채를 만들며 외할머니 얘기를 하는 일이다. 요즘은 딸이 내 사진을 찍으며 외할머니가 보인다는 말을 해서 가슴이 싸르르 저려 올 때가 있다. 엄마의 건강했었던 모습은 남아있지 않고 환자였던 모습만 남아있다. 그 모습마저 희미해지는데, 딸은 나에게서 외할머니가 보인다는 것이다.


2013년 사진, 며칠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이지만 사력을 다해 아름답다.



지금도 여전히 꽃을 꽂아 두고, 그림을 그리며 꽃을 만든다. 가끔은 머리에 꽃을 꽂고 싶다. 특히나 황혼 녁에 운전을 하다가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한다. 해가 지고 저녁을 먹을 시간이면 같이 던 동네 아이들이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고 혼자 동네 놀이터에 남은 것 같은 쓸쓸함을 황혼이면 느낀다.


밥을 해 놓고 불러주는 엄마가 없는 쓸쓸한 아이같은 '내가'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로 있다. 그 아이는 초가을 해 질 녘에 몸살을 앓으며 머리에 꽃을 꽂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요즘 같이 산수유 꽃이 피려 하면 기어이 울음을 쏟고 만다. 몽우리가 맺혀 있는 가지를 꺾어 식탁에 꽂아 두고, 나도 한때는 엄마가 있었음을 추억하고 기념한다.


어릴 적에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인 줄 알았다. 지금은 딸이, 엄마는 계속 엄마인 줄 알았다고 한다. 나에게도 인형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믿지 못한다. 엄마인 나도 엄마가 있었고, 나도 엄마한테 비빔국수를 만들어 달라 하고 싶다.

동네를 다 돌아다녀도 산수유가 보이지 않아, 결국 꺾어다 놓은 매화 - 2020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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