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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Mar 06. 2020

이혼과 사별, 뭐가 더 힘들까?

고난을 받아들이는 5단계는 <부정-분노-협상-우울-순응>이라고 들었다. 암 선고나 가족의 죽음은 대충 비슷한 단계를 거치는 듯하다.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을 때 환자 본인인 엄마나 우리 가족의 마음 상태가 그랬다. 잠이 깨면 엄마가 다시 일어나 걸을 것만 같은 시간을 몇 달 보냈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세트로 밀려오는지 내 팔자를 탓하기를 1년 했다.


그리고는 엄마를 환자로 받아들이고 환자여도 더 오래 있어주길 바랬다. 엄마가 환자로 누워계시는 7년간 이미 부정, 분노, 협상의 단계를 거친 셈이다. 돌아가시니 잠깐의 우울 기간을 거치고 바로 순응으로 들어가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움과 죄책감이 생겼을 정도이다.


이혼을 한 후의 증세는 분노-분노-분노에 우울이 계속인 경우가 많다. 자식이 있으니 전남편과 계속 연락을 할 일이 생겼다. 아이의 진학이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때 의논을 하려고 해도 결국은 분쟁이 되었다. 몇 마디라도 길어지면 예전 얘기가 나오고, 서로를 탓하며 똑같은 싸움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을 때가 엄마의 환자 기간과 겹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이도 중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는 분노와 우울의 단계를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 당시 나는 바느질 공방과 방과 후 수업을 했다.


공방 손님이기도 하고 친구의 엄마이기도 한 어머니가 있었다. 친구 어머니는 50대 후반이었고 남편분은 젊은 날부터 당뇨와 지병으로 일을 못하셨다. 친구 엄마가 농사일과 장사를 하시며 두 남매를 키워 모두 출가시킨 상태였다.


체격이 큰 편이라 옷을 맞춰 입기도 하셨는데 오실 때마다 야채나 과일을 건네주시는 인정 많은 분이셨다. 남편분이 당뇨 합병으로 투석을 받다가 결국은 돌아가셨다, 남편분이 열 살이 많았으니 60대 후반에 돌아가신 것이다. 친구 어머니는 아버지가 중환자로 누워계신 몇 달 동안 굉장히 슬퍼하셨다. 평생 한량으로 산 남편이고 혼자 험한 일을 다 해온 어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나로서는 좀 의아했다.


친구 엄마가 사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니 좀 신기했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참 우울 기간을 겪으셨다. 내가 보기에는 저렇게 짐만 되던 남편이 돌아가셨으니 약간은 홀가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울 기간에는 가게 문도 안 열고 농사도 돌보지 않았다. 새벽에 밭에서 일을 하고 과일가게 문을 열던 분이 밭에 풀이 수북하게 버려두었다.


저녁때쯤 과일 가게문을 닫고 밭으로 가기 전에 내 공방에 들던 분이었고 공방 문 앞에 서서 몇 마디 수다를 떨고 바쁘게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던 사람이 집에만 있고 가끔 공방에 와서 신세 한탄을 했다. 처음에는 슬픔에 공감하며 얘기를 들어줬지만 자꾸 들으니 좀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30대 후반이었고 중학생 아이를 키우는 이혼녀였다. 친구 어머니는 50대 후반의 아들, 딸이 모두 결혼을 했고 재산도 꽤나 있는 '할머니'였다. 남편이 70도 안되어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지만 젊은 날부터 지병이 있으셨으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만도 하지 않은가?  60이 다 된 어머니가 40도 안된 이혼녀에게 와서 자기 신세 한탄을 몇 달간 한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듣다 듣다 힘들어서 나는 한마디를 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혼자되신 지 이제 1년이죠? 저는 10년이 다 되어가요. 저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는,

 " 지랄, 너는 네가 싫어서 니 발로 나왔잖아. 그럼 좋았겠지?"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싫어 이혼을 했어도 설마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이혼을 하는 20대 엄마의 마음이 50대 후반의 사별보다 가벼운 일일까?


친구 어머니는 한참 동안 자기 연민에 빠져서 남편분의 자상했던 점을 끊임없이 회상했다. 그냥 어머니 얘기만 듣고 있자면 부부금슬이 너무나 좋은 원앙이었다. 하지만, 친구 아버지는 젊은 날에 직장을 1년 이상 다녀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몸이 안 좋아 시골로 온 후에는 평생 한나절 이상을 일해 본 적이 없는 한량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랬던 남편도 세상을 떠나니 우울과 분노가 있는데 하물며 아이들이 어린 상태에서 생살 떼어 내듯이 잘라버리는 이혼은 얼마나 아플지에 대해서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놀라웠다.


친구 어머니의 분노와 우울 단계를 보면서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자기가 겪는 고난에만 몰입을 하고 남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 단계에서 억울함이 많아지는 현상이었다. 친구 어머니는 남편과의 나이차가 많은 것에 대해 억울해했다. 그래서 사별을 하게 된 것이라고. 사실 나이차 10년이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체질이 문제였는데 말이다. 그러더니 다음 단계는 나이차가 적은 남편을 둔 친구를 시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개 엄마는 남편이 반찬 투정을 해도말 한마디 못하고 다 받아 주더라. 그런 남편하고 어떻게 살아? 없는게 낫지.


이렇게 흉을 보며 남편이 없는 자신의 위치를 그리 나쁘지 않다고 위안을 삼는 것이었다. 친구 어머니의 사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면서 나의 모습도 보여 부끄러웠다. 나도 이혼을 한 초기에는 주변의 행복한 모습이 가짜일 거라 믿거나 가짜이길 바랬다. 내 처지를 억울해했고 남을 끌어내리면 내가 좀 덜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 어머니가 무심코 한 말에서 나는 답을 얻었다.

"나이 60이 넘으면 남편을 잃어도 '과부' 소리를 들을 일이 없고 애처로울 것도 없지. 근데 60도 안 되어 70 다 된 남편을 잃어 '과부' 소리를 듣게 됐으니 남부끄럽지."


그 어머니의 슬픔은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 '과부'라는 남들의 평판이 원인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어머니의 우울과 분노, 억울함에 질투까지 하던 모든 감정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가장으로 살아온 자신의 고단한 평생에 '과부'라는 불명예까지 하나 더 얻는 게 그토록 힘들었던 것이다. 50대의 사별은 '과부'이니 팔자가 센 사람이고, 60대의 사별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받아들여지니, 50대 후반인 어머니는 그렇게도 억울했나 보다.


친구 어머니는 2년을 우울, 분노로 지낸 후 3년 째부터는 순응기에 접어들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밭일을 하고 낮에는 이것저것 배우러 다녔다. 틈날 때마다 계절에 맞는 나물 반찬으로 음식을 해서 사람들을 맛있게 먹여주셨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으며 분노도 하고 우울 할 수 있다. 맘껏 화를 내고 미워하다 보면 어느덧 치료가 되어 순응기에 접어든다. 분노 기간이 너무 길어 억울함이 되는 과정에서 친구를 다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쓴 방법은 내가 갖고 싶은 걸 가진 사람을 칭찬해 주는 것이다. 내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무엇이 힘든지를 빨리 파악하면 분노의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자상한 남편을 가진 사람이 부러웠고, 자녀가 공부를 잘할 때 부러웠다. 친정 엄마가 장아찌나 김치를 담가 주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런 사람들을 맘껏 칭찬해 주면서, 나는 시기심이 줄어들고 우울감이 빨리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또 한 가지는 남 눈을 의식하지 는 것이다. 슬픔이나 고난에서 남의 눈을 무시해 보자. 분노나 우울감도 대부분은 남들이 뭐라 쑤군거릴까를 생각하면 갑자기 폭발한다. 내 마음과 몸, 내가 해야 할 일, 가족에 몰입하면 분노기는 훨씬 짧아질 것이다.


이혼이나 사별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겪는 사람은 처음일 테고 본인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슬픔에만 몰입하지 않고 나와 비슷한, 혹은 새로운 종류의 아픔을 겪는 이에게 공감을 할 수 있는 성숙된 고난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모든 파도를 지나면  결국 꽃은 피고  봄은 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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