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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Mar 20. 2020

 실수가 아니면 알지 못했을 기쁨

출판 계약을 한 후 글을 쓰면서

지난 2월에 출판사에 1차 원고를 넘겼다. 보완해야 할 글을 쓰면서 정말 괴로운 순간을 마주해야 했다. 전남편의 흉을 전 국민에게 봐 놨으니 내 속이 시원할 줄 알았건만, 애당초 왜 나는 그런 인간을 택해서 결혼을 했을까, 하는 난관이 왔다.


전남편이 이혼을 당해 마땅하다는 근거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인내심이 부족해서도, 모성애가 부족해서도 아니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팩트는, 전남편이 형편없으면 없을수록, 새로운 수치심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 사람을 골랐냐고? 그렇게도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냐고?


전남편에게 납치를 당하거나 팔려가듯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니다. 분명히 내가 좋아서, 함께 살면 더 행복할 거라고 선택한 결혼이었다. 어렸다는 말로 실수를 합리화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어린 나이에도 내 친구들은 전남편을 봤을 때 결혼 생활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의심스러워했으니 말이다.


전남편과도 행복하고 희망찬 순간 있었다. 전남편의 장점만을 써 보면 세상 훌륭한 남편감으로 포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쓰려니 화가 나고 나 자신이 수치스러워졌다. 누구 하나 원망을 해 보려 해도 나의 어리석음을 능가할 원인이 없으니 괴로운 것이다.


전남편과의 연애 과정과 나름 행복이라고 느꼈던 순간들을 글로 쓰자니, 그 정도에 속았나? 싶어 한심해 죽을 지경이다. 옆에서 나를 보고 있던 딸이 위로를 해 주었다. 모든 이별은 수치스럽다고. 첫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징징 거렸던 것도 수치스럽고, 두 번째 남자 친구를 만나 자랑스럽게 밥을 먹으러 다닌 것도 한심하다고 했다.


헤어진 남자 친구들이 단순히 애정이 식은 것이 아니라 헤어질 결격사유가 충분했다.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심한 마마보이였고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자기 불안이 심해서 매번 사람을 들들 볶는 유형이었다.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남자 친구도 처음에는 달콤하고 설렘 가득했다는 것이다. 달콤함에 속아 결격사유를 못 본 자신이 수치스럽다고 했다.


안심이 되었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도 내가 한 어리석은 선택에 남부끄러워진다고 했다.  하물며 돈 들여 사람들을 불러 모아 결혼을 선포한 경우는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그런 실수를 나만 하는 것은 아니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게다가 큰 실수로 큰 깨달음도 가지가지로 얻었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깨달음이다. 내가 만만하니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도 넘어가 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돈은 말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숨겨진 <아내의 상자>에는 그 어떤 것 보다 돈이 있어야 할 말을 하게 한다. 오래 참으면 더 참으라고 강요당한다는 것, 결국은 암을 키운다는 것도 배웠다.


싫은 것을 쌓아두지 말고 그때 그때 가볍게 얘기해야 먹힌다. 싫은 것을 참으면서 울분을 함께 쌓으면 꺼낼 때 독성이 너무 강해진다. 나중에 꺼내놓으려면  꺼내는 나에게도 데미지를 준다는 걸 배웠다. 이런 깨달음을 준 '실수'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책으로 읽거나 듣기만 해서는 내 것이 되지 않았을 것들이다. 그럼, 젊은 날로 다시 가도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을까? 어리석은 선택을 해도 크게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배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남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들, 딸과 같은 아이는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남자를 볼 줄 몰라 선택한 전남편이 아니면 영원히 못 만날 아이들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내가 한 선택이 덜 괴롭고, 용납하기가 수월했다. 이혼을 하면서 상처를 떠안기도 하지만 자식이라는 선물도 얻었다. 철들고 똑똑했다면 이것저것 재느라 얻지 못했을 것 같다.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몰랐으니 겁도 없이 자식을 가질 수 있었다.


실수가 아니었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생명이 얼마나 많은가? 피임에 실패해서 셋째를 낳았고, 그  늦둥이가 사는 낙이라는 글은 커뮤니티에 넘친다. 아들이 아니어서 실망과 함께 태어난 딸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 도리도 하고 부모 노릇도 하며, 나에게 주어진 몫의 행복을 찾아 누리며 산다.


내가 한 어리석은 선택으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다. 과거의 선택은 수치스럽지만 덕분에 오늘의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 예전의 선택이 나를 키운 셈이다. 내가 자랐으니 예전의 내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줄도 알게 되었다. 즉, 과거의 선택이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된 나는 과거의 나보다는 똑똑해진 것이다.


예전의 내가 후회스럽지 않다면 '어린 내가 어쩜 그리 기특하지?' 하면 된다. 예전의 내가 부끄러워 죽겠다면, '음, 지금의 나는 꽤나 성숙했구나.' 하면 된다.


출판사에 넘길 글을 쓰면서 정신승리를 오지게 하고 있다.

두려울 때 마다 떠올리며, 용기를 쥐어 짜내게 해 준 바다, vitamin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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