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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Apr 30. 2020

두려움 중 제일은 이혼이었지만

나도 거의 작가다

초등학교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무서운지에 대해 말해 보자고 하셨다. 아이들은 귀신, 도깨비, 호랑이 같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추상적인 것들을 말했다. 한 명이 상당히 구체적 두려움인 뱀을 얘기했다. 그러자 다음 아이들이 개구리, 쥐, 벌 등을 이야기했고 공감을 한 아이들은 꺅꺅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 친구가 갑자기 ‘술 취한 사람’이라는 말을 던졌다. 순간 교실 분위기가 ‘얼음’이 되었다. 그 누구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맞아. 나는 왜 저 생각을 못했지?’ 했다. 저 말을 내가 했어야 했는데, 싶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대부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실상은 없는지도 모르는 귀신, 도깨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막연한 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그렇다.  뱀이나 쥐 같은 것은 내가 안 건드리면 나를 공격할 일도 없는 것들이다. 조금 구체적 두려움이다. 즉, 마주치면 심장이 좀 뛸 뿐, 별일없다. 누구나 겪는 일이고 자꾸 보면 놀라지도 않는다. 뱀이나, 쥐들이 나를 보고 더 놀라서 순식간에 도망간다. 나이가 들면서 커지는 책임만큼, 커지는 세금고지서 같은 것들이 ‘뱀’ 카테고리 두려움이다. 어린아이가 실질적으로 두려운 사람은 길에서 술 취한 아저씨를 만났을 때이다. 그때는 다른 방법은 없고 죽을힘을 다해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두려움을 마주한다. 내 잘못이 아니지만 36계 줄행랑이 최고 전략이다.  

    

큰아이가 두 돌이 지나고 작은아이가 모유도 떼기 전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다. 열심히 하면 모든 것에는 좋은 성과가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두려움을 맞닥뜨렸다. 최선을 다해도 최선의 결과가 아니라는 걸 배우는 순간이었다.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지만 두 아이를 업고 도망을 가야 하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전남편의 뒤통수를 제대로 한 방 치기 위해 3년 6개월을 준비했다. 전남편이 숨겨놓은 날개옷을 찾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나에게 날개옷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그 날개옷을 훔쳐서 입고, 양손에 아이를 안고 나오느라 내 심장이 다 오그라들었다.

      

숨겨놓은 날개를 찾는 것은 밥벌이를 할 기술과 쪼그라든 간을 키우는 것이었다. 한복 바느질을 배우며 간을 조금씩 키웠다. 이혼을 한 후, 바느질로 밥벌이를 하기에는 계산이 맞지 않았다. 재미는 있는데 돈이 안 되어 길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캐나다 어학연수였다. 아이들을 아빠에게 맡기고 떠난 캐나다 어학연수는 ‘바느질’에 ‘영어’라는 밥벌이 기술을 하나 더 갖는 선물을 주었다. 나의 소박한 복수는 남편의 돈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복을 배우는 비용은 이혼 전이었으니 남편이 거드름을 피우며 냈다. 어학연수 비용은 위자료로 해결했으니, 나의 소박한 복수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거기다 영어를 가르치며 현 남편을 만났으니 전남편이 재혼까지 시켜 준 이다. 아이들에게 언제나 하는 얘기해준다. 아빠는 전남편으로 최고라고. 전남편에게 직접  알려주지 못해 안타깝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로 경제적 독립을 했다. 밤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을 했지만 나는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해야 옷을 덜 사고 신발을 덜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공방이었다. <강다녕 지음>.

     

바느질을 집에서 취미로 하면 동네 엄마들이 바지 단을 박아 달라고 자주 부탁을 한다. 처음 몇 번은 기꺼이 해 줄 수 있다. 나중에는 낡아빠진 남편의 작업복이나 아이들 교복까지 들고 와서 잠깐 두루룩 박아달라고 한다. 짜증이 확 올라온다. 공방이라고 간판을 걸어 놓으공짜로 박아 달라는 사람은 없어다. 이번에는 비싸다며 깎아달라고 떼를 쓴다.

      

천연염색 옷이나 생활한복을 만들어 팔았다. 가끔 입던 한복을 고쳐달라고 오는 사람이 있다.  수선하는 과정을 보니  간단해 보였나 보다. 그거 잠깐 따서 십분 도로록 박는데 뭐 그리 비싸냐고 했다. 그럼 나는 말했다.

“ 어디 따야 하는지 한복의 원리를 아는데 3년 걸렸고요, 10분 만에 후후룩 박으려면 또 3년 숙련기간이 필요해요. 합이 6년을 거친 시간 값인데 그만하면 싸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사무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했다. 스시집이나 물건을 만드는 공장이 바쁜 건 이해가 되지만, 커다란 빌딩에서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사람이 책상에서 왜 바쁜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 사고도 우동집이나 자동차 정비공장 이상을 넘지 못한다. <강다녕 지음>이라는 내 공방은 물건을 만들고 맘에 들면 사는  곳이었다. 우동집 처럼 누구나 이해가 되게 바쁜 곳이었다. 온골목이 깜깜해진 일요일 저녁에도 자 불을 밝히고 미싱을 밟아댔으니 말이다.  

    

바느질 공방을 접고 현 남편과 재혼을 했다. 재혼 후 한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중국으로 갔다. 현남편이 중국에 있는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학교에서 나는 중국인 한국어 교수를  알게 되었다. '은화'라는 한국 이름을 썼고 나를 사석에선  언니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학위를 받은 중국인 교수를 도와 네이티브강사를 했다. 중국 학생들이 한국 예능과 연예계 소식을 나보다 더 빨리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예능과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아이유의 노래를 연습해서 ‘가요교실’을 열었다. 김밥과 김치 만들기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간단한 ‘요리교실’도 열었다. 선크림도 잘 안 바르던 내가, 유튜브로 메이크업 속성으로해서 ‘메이크업’ 강좌도 했다. 한국의 화장품은 단연 인기가 많았다. 메이크업 강좌는 강의실이 아닌 큰 강당을 빌려서 했을 정도였다. 한국어 수업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타과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님들도 와서 메이크업 수업에 참여했다. 중국에 계속 있었더라면 아마 화장품 장사를 했을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와 충남 서해안 시골에 산다. 고향인 경상도에서 전남편도 만났고 그곳에서 이혼도 했다. 현 남편을 만난 곳도 고향인 경상도이다. 처음으로 경상도를 벗어나 살아본다.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그런데, 팔자가 좋아져서 그런지 지금은 또 다른 두려움을 지어내며 산다. 지금 가진 평화가 끝나버릴까 두렵다.


 늦게사 남편이라고 하나 얻었으니, 불면 날아갈 라 쥐면 터질 라 애지중지 한다. 이 남편이 얼마 전 생일을 맞이했다. 나는 기타를 선물로 주었다. 남편이 열심히 기타 연습하는 것을 보면 흐뭇함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다. 한데 기어이 남편이 일을 저질렀다. 자기 생일 선물로 자기에게 뭘 사 줄까 고민을 한다더니, 며칠 전 오토바이를 샀다. 올여름엔 여행도 못 가니 오토바이를 타고 바닷가를 가자는 것이다. 가죽잠바를 입고 헬멧을 쓰고 바다로 가게 생겼다. 이제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기만 하면 들어오기 직전까지 마음을 쫄이게 되었다.

     

파트타임으로 영어학원에서 일을 하는 요즘, 심심하면 글을 쓴다. 운동하랴 넷플릭스 보랴 심심할 틈이 잘 안 난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심심’한 여유시간을 희생시켜 글을 쓰는 것 치고는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 주신다. 쪽지와 메일,  블로그 댓글로도 많은 분이 사연을 공유해 주신다. 내가 뭐라고 내 글에 용기를 받았다 하는지, 그 사연들에 오히려 내가 용기를 얻는다.  내 인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곤 이혼과 재혼 밖에 없다. 내가 제일 잘한 일을 쓰다 보니 줄창 이혼 얘기이고, 이제 다 쏟아냈다. 조회수 폭주하는  글을  또 쓰려면 이혼을 한 번 더 해야 할 판이다.  

    

글로 쓰고 보니, 내가 겪은 불행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고 시련이었다. 나를 번번이 넘어뜨리려 했지만 어떻게 어떻게 꼼지락 거려 웃음을 지어내고 행복을 지어내 왔다. 글을 써서 내 인생을 그럴듯하게 분칠을 해 주니 꽤 봐줄 만했다. 이혼한 덕분에 바느질을 하고 영어공부를 했다. 내가 번 돈으로 세금도 내고 마트도 갔다. 영어를 해서 현남편과 재혼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평생 모르고 살았을 나라에서 신기한 경험도 할수 있었다. 남편과 재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에서 한국 가요나 김밥 만들기를 가르칠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지금은 모두 글감이 되어 주니 이혼을 안 했더라면 어쩔뻔했나 싶다. 전남편 몰래 일기를 써서 위자료를 받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브런치 덕분에 큰 위로를 받은 것이다.  

    

중학교 때 엄마가 듣던 라디오 방송 중,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그 방송에 사연을 보내서 5천 원 권 우체국 수표를 받았다. 심야프로인 김홍신 작가의 방송에도 글을 보내서 상품을 받았다. 전남편과 살 때는 새댁 시절 얘기를 잘 버무려, ‘최유라, 이종환의 지금은 라디오시대’라는 프로에 보냈다. 은수저와 미싱을 받았다.


지역 백일장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 덕분에 문인으로 이름이 어딘가에 올려졌다고, 예전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대회 상품으로, 명장으로 지정받은 작가의 도자기그릇을 받았다. 지금 그 명장도자기는 아버지가 틀니를 담아두는 그릇으로 쓰고 계신다. 글을 써서 장만한 살림이 꽤나 된다. 그러고 보면 나도 거의 작가다.      


이제 두려움의 실체를 안다. 내가 지어낸 허상의 두려움과 고단하지만 이길 수 있는  난관으로 구분한다. 이혼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던 시절에 힘껏 이혼을 해냈다. 한 파도를 넘었다. 싱글맘 시절의 두려움은 매달 돌아오는 고지서와 카드값, 줄어드는 게 보이는 차 기름이었다.  새로운 파도를 넘고 넘어보니  담력이 생겼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도 않고 좀 힘든 일 끝에는 어김없이 선물이 있다는 걸 배웠다. 안 할 수 없어 했던 노동들이 나를 키워주더니, 이제는 거움과 보람을 준다.


행복은 정확히 싸워서 이긴 만큼만 허락되는 듯했다. 도대체 덤이라곤 없이 야박한 줄 알았다. 글을 쓰는 요즘, 덤으로 얻은 행복도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아이들과 노는 것 같은데, 돈을 주니 감사하다. 물건을 사도 채워지지 않는 허함을 글로 채울 수 있어 감사하다. 두려움과 허함을 그림으로 메운다. 바느질로 살맛을 지어낸다. 소비로는 느낄 수 없는 보람을 손으로 꼬물꼬물 지어낸다. 소비를 하면 나 자신이 쓸데없는 사람 같다. 바느질을 해서 이불을 하나 만들면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든 내가 쓸모 있는 것 같다. 글로 내가 겪은 일을 정리해서 누군가에게 약간의 용기를 준다면, 내 불행도 약에 쓰이는 개똥이 된 것 같다. 나의 '쓸모'를 확인하는 것이 덤으로 얻은 행복이다.


도서관에서 그림을 배울 때, 도화지를 세 개 정도 펴 놓고 동시에 그렸다. 하나가 마를 동안 다른 하나를 그리고, 또 하나를 그리다 보면 처음의 것이 다 말라있다. 그렇게 공장식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옆에 앉은 수강생이 말을 했다. “완전 다작, 강다녕입니다.” 작품을 만들면 다작인데, 이건 작품이 아니고 정신건강을 위해 하는 ‘생산’ 활동이니, ‘다산’ 강다녕이라고 말했다. 인생을 지어가고 재미를 ‘다산’하는 강다녕이다. 




공방하던 시절의 명함. 300장을  다 쓰고 새로운 명함을  주문할 때는 더 멋진 사람이고 싶었다. 이제 글을 쓰는 작가, <강다녕 지음>이라는 명함을 갖고 싶다. 거의 작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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