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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통화

한 방

by 단팥빵

어떤 기억은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잊고 싶은가?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약으로 겨우 억누르던 극심한 입덧이 조금 사그라들던 시기였고, 동생의 결혼 이야기를 나누었던 설 연휴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고, 목요일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늦은 오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창가에 서서 따가운 햇살에 두 눈을 찌푸린 채 통화를 했다. 몇 년간 받지 못했던 학비 지원을 받게 될 수도 있으니 납입 영수증을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이미 졸업을 한지 오래이고, 내가 벌어서 갚은 지도 오래인, 나를 옭아맸었던 바로 그 학비. 이번에 정말 돈이 나오는 것인지 미심쩍었지만 동생의 결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기에 나는 그 돈을 받으면 이번에는 아빠가 쓰지 말고 꼭 아들에게 주시라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대기업 다니는 네 년이 동생 결혼하는데 돈 좀 주라는 말에 나의 서러움이 울컥 치솟았다. 아빠에게는 기대하는 게 없었던 인생이었다. 든든한 친정 아빠가 되어주지도 못하면서, 내가 결혼할 때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방학이라고 오랜만에 집에 갔을 때 두들겨 패기나 했으면서, 친척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 먹게 만들었으면서 등등. 함께 산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던 과거의 이야기들까지 차례로 꺼내어 전부 퍼부어대고 싶었으나, 늘 그랬든 본인 하실 말만 하고 뚝 끊긴 전화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월요일,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인어른이 다치셨대.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빨리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와."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 들러서 양복과 구두를 챙기는데도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던 바보 같았던 나다. 가만히 살게 두지를 않는다며, 어쩌다 다치신거냐며, 지겹다는 말을 내뱉으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임산부는 염할 때 안 보는 게 낫겠어요 ··· 누나가 아빠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얼마나 몰아세웠는지 알아? ··· 몸을 깨끗하게 닦아 드리니까 표정이 편안해지셨어요 ··· 화장하지 말고 산소에 모시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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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현실에서 들려오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치 드라마 속의 이야기 같은 대사들이 둥둥 떠다녔다. 무슨 정신으로 산을 오르고, 어떤 심정으로 관에 흙을 뿌렸는지, 겨울 강바람이 얼마나 매서웠는지는 솔직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래처럼 까끌한 시간이 한바탕 지나간 뒤의 봉분 앞에는 남편과 나와 동생만 남았다. 옷을 한 벌 태워줘야 저승길에 입고 간다는 장례 도우미의 말을 따라, 챙겨 온 양복에 불을 붙였다. 내 결혼식에 입고 오시라고 큰맘 먹고 백화점에 가서 맞춰드린 양복이었다. 양복 한 벌에 무슨 백만 원이나 하냐고 만류했었지만, 그때 좋은 옷을 해드리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던 남편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다. 인생의 말년에는 후줄근한 옷만 입고 살았던 아빠에게 저승길에 입고 가실 멀끔한 옷이 있다는 위안과, 그 옷 말고는 제대로 된 옷이 없다는 자책감이 뒤섞여,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이 옷이 마지막일 줄 몰랐는데,

그때 보는 게 마지막일 줄 몰랐는데,

그 통화가 마지막일 줄은 정말 몰랐는데..


살아있다면 내내 내 원망을 들을 웬수였는데, 죽음은 모든 상황을 역전시킨다. 늘 인생은 한 방이라고 허황된 꿈을 좇던 아빠가, 내게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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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입덧으로 인해 얼굴이 핼쑥한 내 얼굴을 무심히 보던 아빠는, 꼴이 그게 뭐냐며 얼굴을 찌푸린 채 몸에 좋은 것 좀 사 먹으라고 내게 용돈을 주셨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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