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념 수양다짐
얼마 전 드림웍스의 <쿵푸팬더>를 다시 봤다. 영화 속 ‘포’는 국수 맛집 주인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포’에게 국수의 비법을 알려주고 가업을 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포’는 쿵푸에 빠져 쿵푸의 비법이 적힌 용문서의 전수자를 정하는 ‘무적 5인방’ 대결을 보려 담을 넘다 우연히 용문서의 전수자가 된다. 모든 만화가 그렇듯 영웅은 산전수전을 겪으며 성장한다. 마침내 쿵푸마스터가 되어 용문서를 획득한 포는 그것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용문서는 ‘포’를 비출 뿐이다. ‘포’가 얻은 깨달음은 비법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노력이라는 것이다. 포의 아버지도 국수의 비법에 대해 ‘Nothing’이라 말한다.
쿵푸도 그림도 일종의 스킬이 중요한 것들이다. 요즘 보이는 그림들은 모든 게 상향평준화되어 있다. 다들 너무나 잘 그리고 기깔나는 형식과 내용, 그것을 넘어 그러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기에 그것을 넘어 오-래, 바르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잊고 산다.
송대 사람들은 세 가지의 수양을 말하는데, 첫째는 문학적인 조예이고, 둘째는 생활의 경력이며, 셋째는 예술 전통에 대한 연구와 계승이다.
등춘은 <화계>의 <논원>에서 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며 ‘그림이란 文의 지극함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단지 기술의 문제만은 아니고, 문학의 지식과 경험이 회화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의 화가가 서예가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고, 비평가이기도 한 시대기에 더욱 강조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황정견은 ‘음악과 여색, 가죽옷과 거마를 멀리하고 가슴속에 수백 권의 책이 있게 한다면 마땅히 문동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가 입에 있고 대나무가 손에 있다”라고 칭해지는 문동을 언급하며 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등춘은 “그 사람됨이 다문이면 비록 그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적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문학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 그림을 그릴 때에도 “자세히 형용”하고 “터럭만큼도 빠뜨리지 않았기”때문이 아니라, 문학과 회화의 공통적인 법칙을 알았기 때문이고, 이를 몰랐다면 비록 문학적 소양이 높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말한다.
가끔 대가들의 전시에 가서 작품과 글을 읽을 때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도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붓을 움직이는 기술을 넘어 무엇이 중요하고, 그것이 나의 내부 어디에 있다가 발현되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다. 삶의 길이와 비례해서 오는 깨달음이라 그런가 싶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한 권을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은가. 주변에 ‘한 권’의 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무조건 읽어야 하는 건 아닐 테다. 그저 아는 것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