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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벨 에포크 시절(1)

by 레드카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어요. 대학을 함께 나온 친구죠.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제 눈에 그 친구는 그 시절 그 모습인 것만 같아요. 그 친구의 눈에도 제가 그렇게 보일까... 는 의문이지만요. (하하)


아이를 낳고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과는 옛이야기를 나눌 일이 잘 없죠. 대부분이 지금, 현재, 오늘 또는 내일의 상황들을 이야기하고 그중 99% 마저도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그 대화들은 아이들에 관한 대화이지 사실상 나에 대한 대화는 아니잖아요. 엄밀하게 따지면 제3자에 대한 이야기를 제3자와 하고 있는 거예요. 오직 책임감과 모성애라는 틀 안에서요.


그런 이야기들만이 간신히 오가는 일상을 살다 보면 엄마인 나 뒤에 숨은 내가 한숨을 쉬어요. 문득문득 그 한숨이 느껴질 때면 심장이 툭 내려앉는 느낌이 들죠. 특히나 저처럼 출산 시기에 일을 그만둔 여자라면 더욱 그 느낌이 크게 울려요. 그 울림은 생각을 채찍질합니다.

'나...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집착일 수도 있어요. 특히 저출산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수년을 박수받아야 할 일임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름 화려했던 나의 지난날에게 미안하기도 해요. 꿈이 있었고, 목표가 있던 시절. 나만의 벨 에포크 시절 말이죠.


아이를 낳고 정신없는 5년 간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지금 나의 일이다...라고 믿었어요. (사실 그렇게 안 하면 못 버티는 시절이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물리적인 손이 덜 가기 시작하는 시기가 왔을 때 다른 각의 압박감이 몰려왔어요. 내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엄마를 소개하게 된다면 뭐라고 할까? 아빠는 회사에 다니고 뭔가 일을 하는데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이라고 얘기를 할까? 아니, 이야기를 안 하더라도 아이의 머릿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


25살의 나는 15년 후 지금과 같은 나의 모습을 상상도 못 했어요. 25살이 가진 꿈과 목표는 나름 거창했으니까요. 원하는 일을 하고 그 일 안에서 최고가 되는 청사진만 뭉게뭉게 그려대고 있었죠. 사회 초년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야근이 일상인 생활이었지만 순진한 낭만이 있었어요. 해냈다. 그래도 이번 건은 해내었다는 성취감도 있었고요.


그렇게 내달려온 일을 하나의 생명 앞에서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왜 아쉽지 않겠어요. 대학을 위해 밤을 샌 수년이 있었고 대학에서 구른 또 몇 년이 있었고, 본판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했던 또 몇 년이 있었는데요. 옛 친구를 만나야만 그 과정을 복기할 수 있는 시절이기도 하고요. 내 아이들은 모르는 엄마의 그 시절. 집에서 빨래하고 숙제 챙기고 저녁 차려주는 엄마 말고 디자인 회의 때문에 며칠간 학교에 머물고, PT를 따내기 위해 몇 주 동안 머리를 싸매던 엄마.


그런데요, 그 시절이 저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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