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94살이셨으니 참 오래 세상에 계셨구나 할 수 있겠네요.
제가 알고 있던 가장 나이 많은 분이 돌아가시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런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산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었죠.
먼저 아빠. 20살 때부터 가장이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들, 거기에 나와 엄마까지 건사한 아빠. 50년, 반백년을 내가 아닌 사람들을 먹였던 아빠는 이제 자유가 되었어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자유가 된 아빠의 마음을 가늠해 보니 눈물이 나더군요. 그렇게 다 퍼주고도 미안함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니 더욱 그랬어요.
그다음에 내 아이들을 생각했습니다. 나도 수십 년 후에 내 아이들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뜨게 될 텐데. 그때 아이들이 느낄 감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어요. 그리움? 슬픔? 아쉬움? 미안함? 후련함? 온갖 복합적인 감정들이 아이들(그땐 다 큰 어른이겠지만요)의 일상을 덮칠 거란 것도요.
장례식장에서 온갖 감정의 뭉터기를 눌러둔 채 아빠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조문객들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다른 일들보다 약간 큰 에피소드일 뿐, 지금 해내야 할 일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달까요? 발인을 마치고 엄마와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비빔국수를 사드셨다고 합니다. 아주 맛있는 집을 찾았다며 저에게도 전화로 꼭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참 반가웠어요. 할머니는 돌아가신 '일'은 마무리가 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또다시 오늘을 내일을 그다음 날을 살아간다. 이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전 제 아이들이 제가 하늘로 돌아가는 날(저 교회 다녀요) 정말 행복했으면 해요. 엄마 사는 동안 수고했어. 힘든 일도 있었고 즐거운 일도 있었지. 많은 추억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편하게 쉬어. 나는 엄마를 잘 보내고 또 내일을 행복하게 살아갈게. 이런 마음으로 제 장례식을 마무리해줬으면 합니다. 부모로서 그것만큼 안심되는 게 또 어디있겠어요?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내 발인날에 넌 가장 맛있는 저녁을 먹으렴. 그리고 우리의 추억 중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꺼내서 디저트로 꼭꼭 씹었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