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가운 무스탕 Jan 06. 2022

<글쓰기> 스무 살의 나에게

해방타운 입주자 가을 MT 편

스무 살주영이에게


2000년 1월 5일의 넌 재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너무 무거울 거야. 내 기억엔 2월 8일에 대성학원에 입학식을 했던 것 같은데 한 달 전이니까 뒤숭숭하겠지.


11월에 수능시험을 보고, 1교시 언어영역을 마치면서 바로 재수를 결정했지.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주에 바로 기말고사를 치렀잖아. 수능도 망했는데, 내신까지 망할 수는 없다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새벽까지 준비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12월 수능성적이 나올 때까지 너무 쪽팔려서 학교 가서는 바로 지구 과학실 준비실로 가 있었잖아. 찬바람 솔솔 부는 창문 열어 놓고 한숨만 쉬었었잖아.


연례행사로 수능성적 나오는 날이 고등학교 축제 시작 날이잖아. 하필 우리 학교는 전야제까지 하는 성대한 축제잖아. 후배들이 준비한 동아리 방에서 그나마 마음을 달랬던 것 같아.


내가 대성학원에 입학을 하러 가는 날, 내 베프는 새터 가는 날이라고 같이 서울 가는 버스에 탔었지. 너무 당황한 건 내 친구도 마찬가지였었어. 서울 가는 네 시간 내내 둘이서 겸언쩍어 했었지.


3월 2일 입학식 날, '내가 뭐가 모자라서 대학에 못 갔을까'라는 생각에 괴로워서 그날은 학원 갔다가 일찍 와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던 것도 나는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래도 주영아,

험난한 재수 시절을 보내고, 치대에 입학했으니 너의 스무 살을 안타깝게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지금까지도 만나는 너의 절친들을 만났고,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더 좋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연락할 방법이 없던 친구들이 생일날 하루 종일 학원 앞에서 기다렸다는 것, 수능 보기 전에 테이프 돌려가며 음성편지 녹음해서 줬다는 것, 수능 전날 후배들이 찾아와서 너를 응원했다는 것들이 그때도 감동이었지만 지금 더 크게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부모님이 얼마나 나를 위해 희생하고 기다렸다는 것, 남동생이 널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을 20년이 지나면 더 크게 알게 되어 기쁠 거야.


마지막으로 너의 스무 살 그 해는 재수생활을 하면서 들었던 나쁜 생각, 좌절의 시간, 절망의 마음들이 이십 년이 지났을 때는 그 일 년이 너무나도 짧아서 부정적인 생각이 1도 남지가 않으니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정말 놀랄 정도로 기억이 안 나고, 결과적으로 좋은 것만 남는다고.


그러니까 주영아,

침울해하지 말고 너의 길을 묵묵히 가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학원 수업 듣고, 낮잠 자고, 저녁 먹고 , 초저녁에 눈 좀 붙였다가 9시부터 2시까지 공부하는 이 패턴을 의심하지 말고 잘 견뎌줘. 너는 너의 스타일대로 살 거거든. ㅎㅎㅎ. 대신 몸 관리는 잘해줘. 마음관리까지 포함이야.


동대문 가서 산, 이노락 두벌로 일 년을 잘 버틴 주영아. 항상 응원하고 기도할게. 사랑해 ❤



작가의 이전글 <인상적인 인트로> 스어억스어억, 거친 숨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