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가 좋으면 다 견뎌져요
이 일을 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지켜왔다. 현장 직원 중에 누구를 특별히 편애한다는 인상을 안 주는 것.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다. 누구는 잘 챙기고 누구는 안 챙긴다는 말이 한번 돌면, 그 매장은 한동안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아끼는 사람이 있어도 겉으로는 티를 잘 안 냈다.
혜진 매니저는 예외였다.
혜진 매니저(가명)는 30대 중반 여성이다. 매장에서만 10년차 베테랑이다. 우리 회사로 오기 전, 내가 다른 회사에 있을 때 타 브랜드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친구였다. 같은 백화점에서 자주 마주치다가 알게 됐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진짜다" 싶었다.
내가 회사를 옮기고 나서, 혜진 매니저한테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혜진 매니저가 다니던 곳은 우리보다 큰 회사였고 급여도 더 많았다. 그런데 의외로 흔쾌히 와줬다. "실장님이 부르시면 가야죠." 그 한마디였다.
와서도 군말이 없었다. 기존 브랜드보다 적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2년을 한 매장에서 묵묵히 일했다. 매출이 안 나오는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신입 스태프가 들어오면 본인이 옆에 붙어서 가르쳤다. 매장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그 위에 한두 가지를 더 했다.
그래서 이 친구한테는 내 원칙을 한 번 깼다. 다른 매장 미팅에서도 "혜진 매니저 보고 배워라"라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이 친구가 웬만한 관리자보다 더 잘한다"라고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했다. 혜진 매니저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혜진 매니저가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실장님, 잠깐 시간 되세요?"
평소 같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사람인데, 그날은 좀 망설였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백화점 지하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혜진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 저 그만두려고요."
순간 머리가 멍했다. "왜요?"라는 말이 바로 안 나왔다. 혜진 매니저가 잠깐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카페를 하나 차리려고 해요. 작은 거요. 동네에서 단골 받는 그런 카페."
뜻밖의 답이었다. 다른 회사로 가는 줄 알았는데, 본인 사업을 한다는 거였다. 잡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잡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혜진 매니저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다. 이미 다 결정하고 온 거다.
"준비는 다 되셨어요?"
"네. 1년 정도 준비했어요. 매장 자리도 봐뒀고, 메뉴도 정해놨어요."
1년.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1년 동안 혜진 매니저는 본인 카페를 준비하면서도 우리 매장에서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안 보였다. 나는 전혀 몰랐다. 옆에서 2년을 함께 일한 사람이 1년 동안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축하드려요. 진심으로." 그 말밖에 안 나왔다.
혜진 매니저 마지막 출근일에 매장에 들렀다.
그녀는 카운터 안쪽에서 본인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은 박스 하나에 노트 몇 권, 펜 몇 자루, 다이어리 한 권. 2년을 일한 사람의 짐치고는 너무 단출했다.
"정리할 게 별로 없네요?"
혜진 매니저가 웃었다. "원래 매장에는 짐 안 두고 다녀요. 매장은 제 거 아니니까요."
매장이 자기 거 아니라는 말. 그 말이 묘하게 남았다. 매장을 자기 것처럼 일하는 사람이 매장에 짐을 안 두고 다닌다. 그게 이 사람의 방식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카운터 옆에 서서 매장을 한번 둘러봤다. 행거에 걸린 옷들이 사이즈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고, 피팅룸 앞 거울에는 얼룩 하나 없었다. 매일 같은 모습을 유지해주었던 혜진 매니저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다.
"혜진 매니저, 우리가 잘했나 모르겠어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진심이었다. 적은 급여로 일한 사람을 충분히 챙기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그제야 올라왔다.
혜진 매니저가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실장님,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떠나면서 생각해봤거든요. 제가 여기서 버틸 수 있었던 게 뭘까."
혜진 매니저가 잠깐 뜸을 들였다.
"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급여나 브랜드가 아니에요. 옆자리예요. 옆자리가 좋으면 다 견뎌져요. 우리 매장은 옆자리가 좋았어요."
"옆자리요?"
"네.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요. 동료요."
옆자리. 동료.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혜진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사실 급여 적은 거 알았어요. 다른 데로 갈 수도 있었고요. 근데 우리 매장 동료들이 너무 좋더라고요. 서로 챙겨주고, 힘들 때 옆에서 한마디 해주고, 매출 안 나오는 날 같이 한숨 쉬어주고. 그런 게 있으니까 시간이 금방 갔어요."
"실장님이 매장 분위기 좋게 만들어주신 것도 맞아요. 근데 매일 옆에 있는 건 실장님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거든요. 결국 그 사람들이 저를 여기 있게 한 거예요."
가는 길 내내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옆자리가 좋으면 다 견뎌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웠다. 나는 사람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경력, 매출 능력, 응대 스킬을 봤다. 그 사람이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될지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매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건 매니저의 리더십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매니저를 잘 뽑으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혜진 매니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매장을 견디게 하는 건 위에서 내려오는 리더십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서 있는 사람이라고. 그게 좋으면 적은 급여도, 힘든 고객도, 긴 시간도 견딜 수 있다고.
20년 이 일을 했는데 그걸 몰랐다. 아니, 알았는데 잊고 있었다. 일이 많아지고 매장이 늘면서, 사람을 숫자로 채우는 데 익숙해진 거다. 한 명이 비면 한 명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한 명이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될지는 살피지 않았다.
그 후로 채용 방식을 조금 바꿨다. 새로운 사람을 뽑을 때 매장 매니저한테 한 가지를 꼭 묻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들어오면 우리 스태프들이 편해할 것 같아요?" 매뉴얼에는 없는 질문이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매장에 들를 때, 매니저뿐 아니라 옆자리 스태프들의 얼굴도 같이 본다. 그 얼굴이 편해 보이면 그 매장은 괜찮은 거다. 매출이 좀 부족해도 시간이 지나면 따라온다. 옆자리가 무너진 매장은 매출이 좋아도 결국 사람이 떠난다. 그걸 혜진 매니저가 가르쳐줬다.
혜진 매니저는 지금 어딘가에서 본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 SNS에 사진이 올라오는데, 작고 깔끔한 가게인것 같다.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아직 못 가봤다. 가면 분명히 또 뭔가를 배우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오랜기간 알고 함께 일한 사람이 떠나면서 남긴 한마디가, 그 후로 내가 사람을 보는 방식을 바꿨다. 옆자리. 그 단순한 단어 하나가 20년 경력의 관리자가 놓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걸 비춰줬다.
떠나는 사람을 잡는 건 어렵다. 잡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떠나는 사람한테 배우는 건 다른 일이다. 마지막 자리에서 진심으로 한마디를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한마디는 남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된다.
혜진 매니저가 그랬다. 본인은 떠나면서도, 자기 자리를 채울 다음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를 남겼다. "옆자리가 좋으면 다 견뎌져요." 그 말 덕분에 우리 매장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조금 더 좋은 옆자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떠나는 사람이 가장 정직하다. 잡으려 하기보다 잘 보내드리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 한마디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게 남는 사람의 일이라는 걸, 혜진 매니저한테 또 하나 배웠다.
HR/아웃소싱 20년차 직장인입니다. 리테일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