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숫자를 만든 사람들의 오늘
사업을 하다 보면 결국 숫자로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매출, 영업이익, 객단가, 전년 대비 성장률. 보고서에 찍힌 숫자 하나가 그달의 성과가 되고, 분기의 평가가 되고, 한 해의 자부심이 된다.
고객사도 숫자를 본다. 백화점도 숫자를 본다. "이번 달 매출이 얼마죠?" "작년 동월 대비 몇 퍼센트 올랐어요?" 그 질문에 답하는 게 내 일이다. 그래서 매달 말이 되면 엑셀 파일을 열어 숫자를 정리한다. 그 숫자가 곧 회사의 얼굴이니까.
그런데 가끔 그 엑셀 창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화면이 흐릿해질 때가 있다.
숫자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하루들이 쌓였는지, 나는 안다.
매출이 오른 그 매장에는, 다리가 퉁퉁 붓도록 종일 서 있는 여사님이 계신다. 객단가가 높아진 그 브랜드에는, 고객 한 명한테 한 시간 넘게 설명드리는 스태프가 있다. 고객사 평가가 올라간 그 현장에는, 이른 오전에 나와 매장을 정리하고 늦은 밤까지 마감을 챙기는 매니저가 있다. 그 사람들이 만든 시간이 숫자로 바뀌어 내 모니터에 찍힌다.
대형마트에서 시연하시는 여사님들. 하루 종일 같은 인사말을 반복하시다가 목이 쉬어도, 고객이 지나가면 또 웃으며 한 번 더 권하시는 분들. 그 분들의 목소리가 그날 매출이 된다.
팝업스토어에서 일하는 스물 몇 살짜리 새내기 스태프들. 경력이 없어서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점심을 제대로 못 챙기면서도 고객 앞에서는 밝게 웃는 친구들. 그 친구들의 하루가 브랜드 이미지가 된다.
백화점 매장에서 10년 넘게 일한 매니저들.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혼자 받아내고, 뒷말이 돌아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 사람들의 인내가 브랜드의 경쟁력이 된다.
나는 그 분들을 보면서 늘 미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매달 보고서에 숫자를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이 일을 하는 내내 따라다녔다.
20년 전이었다. 처음 이 업계에 들어왔을 때 매일 현장을 뛰어다니면서도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다. 명단을 보고 전화를 돌리고, 매장에 사람을 넣고, 사고가 나면 달려가는 일이 하루의 전부였다.
주임이 됐을 때는 책임져야 할 매장이 늘었다. 대리가 됐을 때는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과장이 됐을 때는 고객사와 협상을 시작했다. 차장이 됐을 때는 후배들의 사정이 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팀장이 됐을 때는 숫자를 만드는 게 내 책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어느 날 본부장이 됐다. 아직도 그 무게가 잘 실감이 안 난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를 이끌어준 건 선배들의 한마디였고, 나를 버티게 한 건 동료들의 옆자리였다. 혼자 온 길이 아니었다.
창고형 마트에서 만났던 정미 여사님이 떠오른다. 자주 오시는 고객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외우시던 분. 그 분이 받으신 손편지 한 장은 내가 사람 관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였다.
백화점 명품 편집 매장에서 일했던 수연 매니저도 생각난다. "죄송합니다"가 하루에 열 번씩 입에 붙는 사람. 그 분을 보면서 사과와 대응의 차이를 배웠다.
팝업에서 50패키지를 팔아낸 수아도 잊히지 않는다. 스물네 살 단기 스태프가 한 말 "저 때문에 매출 올랐어요"는 잡매니저 경력 20년의 관리자가 더 솔직한 자기 인식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매달 숫자를 정리하는 관리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분들이 내게 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계속 일깨워줬다.
시간이 지나 함께 했던 동료들이 떠나고 젋은 시절을 보냈던 회사도 떠나고, 어느덧 꿈꾸던 리테일 현장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투자 기회를 받아 사업장 전체를 관리하는 본부장이 되었다. 호칭과 역활이 바뀌었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다. 여전히 일주일에 몇 번씩 매장을 돈다. 보고서로는 잘 안 보이는 것들이 현장에 가면 보인다. 행거 간격, 고객 동선, 스태프 표정. 그걸 직접 보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장에 가면 가끔 매니저들이 묻는다. "본부장님은 왜 이렇게 자주 오세요?"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답한다. "현장에 와봐야 안심이 되서요."
답은 늘 현장에 있었다. 회의실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매장에 한 번 가는 것만 못했다. 그 진리를 20년 동안 배웠다.
고객사에 보고 메일을 보내며 생각한다. 뉴비즈원이라는 함께 하고자 하는 울타리 안에서 오늘 이 숫자를 만든 분들이 지금 어디에 계실까. 마감 정리를 하고 계신 분도 있을 거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다리를 주무르고 계신 분도 있을 거다. 누군가는 내일 아침 일찍 나오기 위해 벌써 잠자리에 드셨을 수도 있다.
그분들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인사드릴 수는 없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라도 전하고 싶다.
여러분이 만드신 숫자가 제 모니터에 찍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와 웃음이 쌓였는지 저는 압니다. 제가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일하시는 매장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이 되도록,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감사의 방식입니다.
「매장 뒤편의 사람들」 1권을 여기서 닫는다.
15편 모두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였다. 이름과 약간의 배경은 바꿨지만, 그 분들의 하루는 진짜였다. 글을 쓰는 동안 내내 그 분들이 어깨 너머로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이야기들이라 썼다.
매장은 숫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숫자는 사람이 만든다. 그러니까 결국, 매장은 사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게 이 일을 20년 해온 사람이 내린 단 하나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가르쳐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HR/아웃소싱 20년차 직장인입니다. 리테일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