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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유지인 Sep 22. 2021

2. 처음 겪어보는 계급사회의 낯섦이란...  

직급이 당신을 대표하리라.

공무원이 되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바로 계급사회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때문에 직급이 매우 중요한데,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계급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알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냥 각자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거고, 선배에겐 선배 대접을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상사가 시키는 일이 있으면 군 말없이 하고, 토 달지 않고, 일단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되는 문화. 이런 거 아닌가. 내가 아무리 평등 문화를 강조하는 기업에 있었다고 해도 조직은 조직. 그곳에도 당연히 위계질서라는 게 있었는데 뭐 얼마나 크게 다를까. 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계급 문화... 생각보다 더 낯설었다.


공무원 조직에선 아무리 연차가 높은 베테랑 주무관이라 해도 5급 신입 사무관에게 A부터 Z까지의 일들을 보고해야 한다. 급수가 높으면 철저하게 어른이고, 의사결정자다. 머리가 희끗한 주무관이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먹으며 데이트할 것 같은 사무관에게 결재받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어색한가? 이곳에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일반 기업은 대부분 사원에서 시작한다.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선배가 된다. 시작하는 나이대도 비슷비슷하다. 20대 중반~30대 초반. 조금 더 빨리 승진을 하거나, 조금 더 늦게 승진을 하거나. 이런 차이 정도지 같은 대리면서 2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는 없다.


간혹, 박사 졸업자나 특별한 이력으로 과장이나 팀장으로 입사하는 특채가 있긴 하지만 일단 그 수가 많지 않고, 그들도 사회 초년생 시절 어딘가에서 바닥을 박박 기면서 누군가에게 구박을 받고 삽질을 하다 온 경우가 많아서 이질감이 그렇게 크지 않다. 혹시 넘사벽 능력자라면 그냥 깔끔하게 인정.


그런데 공무원은 신입은 신입인데 신입이 상사로 들어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9급, 7급, 5급이라는 공채 시험을 선택해서 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9급에서 5급까지 20년 걸려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살에 5급으로 바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학교 동기인데도 누구는 5급, 누구는 7급, 누구는 9급으로 입사하는 경우도 있고, 동아리 선배가 늦게 합격해서 후배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일. 나이 많은 부하직원과 어린 상사의 이야기는 오피스 물에도 흔히 나오고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건 바로 극존칭 존댓말 문화였다.


물론, 성인이 되어 일로 만난 사이인 만큼 급수든 나이든 상관없이 서로 경어를 쓰는 것이야 매우 권장할 만한 이야기지만, 보통의 경어가 아니고 동생에게  높임 선어말어미 -시-를 써가며 하는 문화를 접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40대 주무관이 20대 사무관에게 "식사하셨어요?"라고 묻는다. "어떤 거 드시겠어요?"라고 말하고, "제가 미리 주문해놓을게요."라고 한다. 근데 이게 나만 어색해. 나만. 다들 너무 자연스러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저 친구가 한참 동생인 거 아는데 '식사하셨어요?'가 웬 말이냐. 그런데  마땅히 쓸 수 있는 말도 없다. 밥 먹었어요?라고 할 거야, 식사했어요?라고 할 거야. 당장, "결재 올렸습니다. 승인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내 상관인데 어떻게 그래. 극존칭이 아닌 것도 참 이상하다.


위에 언급한 존댓말이야 하나의 예시인 , 쉽게 말해서 공무원 임용은 30년짜 계급 사회로 들어오는 것과 같다. 어지간해서는 역전하기가 힘들다. 급수가 곧 역량이고 책임이다. 그 사람의 배경, 능력, 경험치보다 급수가 모든 걸 대표한다.


그래서 빨리 리더가 되고 싶고 앞장서서 일을 추진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5급 행시를 보는 것을 추천하고 적어도 7급 이상에서 시작하길 바란다.(미안하다. 말은 참 쉽다.) 진짜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것이고 젊은 리더로서의 성취감도 높을 것이다. 그런 성격의 사람이 9급에서 시작하면 한동안 조금 많이 답답하고 힘들 것 같다. 적절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안민가의 군다이 신다이 민다이 하날단 나라악 태평하니 잇다.처럼, 공무원도 5급답게, 7급답게, 9급답게 일해야 나라가 태평해지는 시스템이라 그 답게를 넘어서 일하는 건 어려운 구조다.


내가 체감하기에 업무권한이나 업무강도 부문에서 5급 사무관이 대기업 과장, 차장과 비슷한 느낌인데(공식 대조표로는 6급이 과장, 5급이 차장이다.), 기업에서 사원으로 시작하면 10년 정도 후에 간부의 맛을 보게 되는 반면, 9급이 내 목소리를 내기엔 시간이 조금 더 많이 걸린다. 그러니 일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업에서 사원으로 시작하고 거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몸값을 높이는 걸 추천한다. 꼭 공무원이 되고 싶으면 훗날 나처럼 경력채용으로 입사하는 것도 방법이고.


그렇다면 행정고시만이 답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대접해주고, 치켜올려주고, 존댓말 써주면 좋을 것 같은가? 이것도 성격이 맞아야 하지.


공시생 중에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5급 시험을 봐야지!라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막상 들어오면 어마어마한 책임감에 부담이 많을 거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공무 조직은 상명하복의 문화인데 젊은 나이에 5급 사무관으로 일하려면 일단 본인의 의사결정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연차 높은 주무관에게 의지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다들 나를 높여주며 나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서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면 얼마나 모양이 빠지는가. 또한, 나이든 부하직원이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도 이겨내야 하는 부분이다. 그 기싸움에서 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혹독하게 훈련을 받는 느낌이다. 시간이 흘러 자리가 사람을 만들 테지만,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자리다. 견뎌내면 왕이 되는 자리이긴 한데 이게 맞지 않는 사람이면 그 속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질는지...


자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대기업이냐 공무원이냐. 선택하기에 앞서 본인의 성격과 성향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르지 않겠는가. 의외로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금방 그만두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엄청 많다. 9급은 물론 5급도 많다.


이 길이 아닌가벼... 를 깨닫기 전에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먼저 알고 준비를 했으면 시간을 좀 세이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인생이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이야 없지만 그래도 말이다. 어느 급수든 무조건 합격하기만 해 주세요...라고 하기엔 사무실 시계는 생각보다 매우 천천히 간다.


지금까지 공무원 계급사회의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 편에는 "내 아무리 리더가 되는 것에 욕심이 없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사는 게  꿈이라지만 평생 어린 상사를 모시며 사는 건 힘들겠소!"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고자 한다. 걱정하지 말라. 조직이 그렇게 차갑지는 않다. 하급 직원도 견딜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더라. 기업에는 절대 없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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