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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유지인 Oct 04. 2021

5. 사노비에서 공노비가 되면 달라지는 것

오늘도 열일하는 회사원을 위하여... 치얼스.

무한도전의 많고 많은 짤 중에 회사원들이 각별히 아끼는 짤이 있다. 바로, 2013년 11월. 관상-왕게임 편에 나오는 회사원 노비 짤.  


무한도전 멤버들이 양반에서 천민까지 조선시대의 다양한 신분을 부여받고 서울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왕게임을 벌이는 내용인데, 기생 옷을 입은 노홍철 씨가 지나가는 시민에게 묻는 장면이다.  


노홍철 : "실례지만, 직업이 뭐요?"

시   민 : "회사원이요."

노홍철 : "회사원이 뭐요? 계급으로 따지면 천민이냐... 양반이냐..."

시   민 : "노비요. 노비."


토요일 저녁, 소파에 누워 멍하니 TV를 보고 있다가  '푸핫!' 하고 뿜었던 기억이 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의 "노비요. 노비." 슬픔도 절망도 없이 그저 덤덤한 목소리의 "노비요. 노비."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노비요. 노비."


다음 날, 나 외에도 얼마나 많은 회사원들이 공감을 했던지, 지나가는 행인의 짧은 출연은 인터넷과 커뮤니티를 뒤흔들었고 이것은 곧 레전드가 되었다.  "노비요. 노비." 


그렇다. 현대의 회사원들은 오늘도 스스로를 노비라고 생각하며 "아유... 하기 싫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을 대신해서 힘든 노역을 해야지만 먹고사는 처지이니 만큼 노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게 틀린 말도 아닐 텐데, 신기한 건 나는 내가 노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한도전을 처음 봤을 때도 그냥 깔깔 거리고 웃고 말았지. 저 마음 깊은 곳에는 그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었다. 미쳤나 봐.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노비가 바로 주인의식이 있는 노비일 텐데 그게 바로 나야 나. 나야 나.


나는 조직 생활을 좋아했고, 회사의 발전을 진심으로 원했다. 유능한 노동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일을 안 하려고 하거나,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이라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현대 교육 시스템의 희생자라고도 하던데, 원인은 차치하고 어쨌든. 나는 딱히 야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늘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나의 미래를 꿈꿨다. 회사가 칭찬을 받으면 어깨가 으쓱거려졌고, 욕을 먹으면 화가 났다. 내 노력이 회사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산업을 키울 수 있길. 그런 마음으로 10년을 보내던 어느 날.

 

비전과 희망을 노래한 창립기념일 행사를 즐겁게 마치고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비싼 파마를 하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카톡이 난리가 나고 동시에 전화가 울렸다.


"우리 회사가 팔린대요! 지금 뉴스에 쫙 어요!"


내가 다니던 회사는 M&A로 성장을 해 온 회사였다. 그룹 차원에서 공격적인 투자 지원을 받아 소규모 회사들을 끌어 모았고, 그렇게 몸집을 불려 1등 규모의 회사가 된 곳이었는데,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나도 M&A 회사의 직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수합병으로 새롭게 가족이 된 동료들을 챙기며 '우리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당신응원해요.'라고 말하고 다녔으면서. 나는 왜 그 입장이 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고용 불안정, 불안한 미래. 이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더라. 그저, 난 버림받았어. 한마디 얘기하자면 보기 좋게 차인 것 같다는 생각. 10년간의 연애가 알고 보니 짝사랑이었음을 알게 된 때와 비슷할까. 그제야 벗겨지는 콩깍지. 그리고 밀려오는 거대한 쪽팔림.


멘탈이 강한 친구들이나, 자의든 타의든 여러 번 직장을 옮긴 직원들은 이런 충격파 또한 콧웃음으로 넘기며 "월급쟁이가 회사 간판 바뀌는 게  뭐가 문젠데?", "그래서 얼마 준대? 이럴 때 한몫 챙겨야지!"라며 덤덤히 말하곤 했지만, 그건 쿨내 넘치는 그들의 이야기고. 나 같이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힘들고 아픈 시간이었단 말이지.


그런 일이 있은 후,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던 때에 리모콘을 돌리며 몇 년이 지난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는데 저 "노비요. 노비."가 나오니 내가 소파에 계속 누워 있을 수가 있어 없어.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 유레카를 외쳤지.


"아! 나는 노비였구나!!!"


그리고 자문자답의 시간.


그나마 덜 억울한 노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품삯을 많이 받는다.

→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난다.

→ 더 열심히 일해서 나를 판 주인의 배를 아프게 한다.

 

뭐를 생각해봐도 참... 질척 질척한 노비의 한계만 확인할 뿐이더라. 그냥 이대로 우리 같이 잘 살면 안 돼요? 응. 안돼.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전향을 했다. 공노비가 되어보니 단점이 매우 매우 많지만, 한 가지 정말 큰 장점이 있다. 바로,


쫄지 않는 노비가 될 수 있다는 것.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일하러 나가야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고, 일을 못하면 선배 노비에게 혼나는 건 사노비나 공노비나 똑같다. 그런데 공노비는 목이 터져라 픽미! 픽미! 픽미업! 을 외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인이 언젠가 나를 팔아버릴 거야.'라는 의심을 필요가 없고, '내가 열심히 일해봤자 주인 배만 불려주는 걸 거야.' 라며 헛헛해할 필요가 없고, "여보시오. 주인 양반. 쌀을 수확하면 나눠 줘야 합니다! 꼭이요!" 이런 딜도 필요 없다. 그냥 내 일만 묵묵히 하면 되는 노비. 그런 단순한 노비가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게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냐면.  


공노비들은 뭔가... 닳고 닳은 느낌이 아니다. 그 안에도 세력이 있고, 이전투구가 있고, 골목대장이 있고, 망나니도 있고, 못돼 처먹은 사람도 있고, 쭈글이도 있는데, 다들 기본적으로 전투사의 모습이 아니다. 날 선 칼을 들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뭐야. 나만 싸우러 왔어? 돌격 안 해? 회사는 전쟁터고 밖은 지옥인 거 몰라? 여기 동막골이야? 팝콘 튀겨? 안테나 세우고! 귀 쫑긋 세우고! 눈에 불을 켜고! 신경을 곤두세워 돌아가는 판을 읽지 못하면 다 죽는 거 몰라? 미생 안 봤어? 미생! 오징어 게임! 몰라? 도대체 여긴 왜 이렇게 다른 거야! 생각해봤는데.


아. 그럴 필요가 없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부러운 사람의 유형이 달라지는데. 10대 때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고, 20대 때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부러웠고, 30대 때는 부모가 부자인 사람이 부러웠다. 40대가 되어보니 이제는 그냥 쫄지 않는 사람이 부럽더라.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여기 있네. 뭐야. 돈은 쥐꼬리만큼 벌면서 쫄지 않아. "나는 삐까뻔쩍한 주인집에서 일한다~ 느이 집에는 이런 거 없지?" 해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분위기. 에라이. 그래. 니 똥 굵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바로 이런 점이다. 비록, 지갑은 가벼워졌을지언정, 사람이 겁이 없어졌다. 남과 비교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나를 증명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사람이 둥글둥글해졌다. 아몰랑. 남이사. 나는 내 길을 가련다. 그러고 산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아.. 매력 없어. 아... 재미없어. 아... 실망이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삶. 발전 없는 안빈낙도의 삶. 그걸 미래의 내가 살고 있다고? 내가? 이렇게 말하며 분개하고 있겠지.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따스한 목소리로.


"조심해. 한테 물리면 마이 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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