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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유지인 Oct 08. 2021

6. 난독증이면 절대 할 수 없는 직업.

입은 거들뿐...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

"공무원은 문서로 말합니다."


공무원이 된 사회 초년생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아무리 업무 진척도가 높다고 할지라도 문서로 작성해 부서장에게 결재를 받지 못했다면 무용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냥 아 그렇구나... 생각하고 말 지 모르겠는데. 실무진에게 말의 뜻은 그냥 모든 것을.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굳이~ 글로 써서 남겨야 한다는 뜻이다.  


공무원이 되고 처음에는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름 글 써서 밥을 벌어먹고 살던 사람인지라 기승전결로 통하는 문서 작성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왜?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지? 하는 "왜?" 병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할 때에는 문서 3종 세트가 기본이다. 계획보고서-실행보고서-결과보고서. 중간에 수정할 것이 있다면 수정 보고서가 포함된다. 이 보고서를 정리하기 위한 의견 수렴, 자료 조사 등의 행위가 필요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또 의견 수렴을 위한 준비-실행-결과의 문서가 문어발처럼 따라 들어간다. 나중에 모든 게 쌓여 결과보고서를 보면 거의 책 한 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기업에서는 부서 간 커뮤니케이션을 사내 메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매너를 지키며 정중하게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다고 정해진 양식은 따로 없다. 안녕하세요. 누구누구 입니다.로 시작해 메일 안에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포함되고 마무리 인사를 하면 된다. 수신인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들이거나, 약간 가벼운 내용이라면 이모티콘 등을 활용해 경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공무원은 커뮤니케이션을 문서로 한다. 공문서는 양식이 정해져 있다. 딱딱하다. 다까체를 쓰고 ~하고자 함. ~임. 등 개조식 문장을 쓴다. 개조식이란 단어는 여기 와서 처음 들어봤다.


프로세스는 이렇다.

1.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해(MS 워드 아님)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에는 배경, 목적, 방향, 예산, 일정, 향후 계획, 별첨 등이 담긴다.

2. 보고서 파일을 문서 시스템에 업로드한다.

그곳에 메일 본문을 쓰듯 내용써야 하는데 우선, 문서가 이전에 어떤 문서와 관련이 있는지 문서번호를 찾아서 쓰고, 보고서의 목적은 무엇인지 쓰고, 내용은 무엇인지 쓰고, 회신을 해야 한다면 언제까지인지 쓰고, 첨부파일은 총 몇 개가 들어 있는지 쓰고, 그 파일의 제목은 무엇인지 등등을 쓴다.

3. 문서 카드를 작성한다.

문서의 색인을 만드는 거랑 비슷한데 결재 라인이 어떻게 되는지, 서명을 할 것인지 직인을 찍을 것인지, 내부결재인지 외부로 보내는 것인지, 수신인 발신인이 누구인지 이런 걸 적는 것이다. 준비가 되었으면 오타가 있는지 보고, 맞춤법과 띄어쓰기 검사를 완료한 후 상신을 하면 된다. 이후, 사무관이 검토를 하고, 부서장이 결재를 해서 문서 번호가 생성되면 드디어 하나의 대화가 마무리된다.


어떤가. 뭐 하나 말하기가 쉽지가 않다. 절차도 절차인데 작성법 또한 기가 막힌다.

글꼴, 폰트 사이즈, □, ○, - 기호 순서 등 모든 작성법이 규정되어 있다. 최근에 내가 입에 달고 사는 건, "붙임이랑 끝이랑 모두 두 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항상 문서의 맨 마지막에는 첨부파일이 무엇인지를 써야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붙임  혁신적인 조직문화 만들기 TF 준비를 위한 회의 알림 1부.  끝.


저 붙임 뒤와 끝 앞에 한 칸을 띄우는지 두 칸을 띄우는지 헷갈린 것이다. 찾아봤는데, 두 칸이더라. 까먹을까 봐 노래처럼 외웠다. 붙임이랑 끝이랑 모두 두 칸. 저렇게 써야 한다.


기업에서는 일의 결과가 중요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최종 보고서를 위한 행위라고 한다면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 사이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또 하나의 일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거 신경 쓸 시간에 더 공부하고, 더 고민하라. 이것이 기업의 기조다.


공무원은 일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과 절차를 매우 중요시 여긴다. 일의 최종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가 많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단계를 하나하나 같은 무게감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래야 내 말이 전달이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서를 써야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공무원에게는 문서를 읽어야 하는 의무 같은 것도 있다. 누가 말을 하면 그걸 들어야 할 거 아닌가. 누군가 내게 문서나 메모를 보내거나 공유했으면 나는 그것을 읽어야 한다. '아... 그거 아직 못 봤는데요.' 하면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문서로 말한다는 뜻은 문서를 들어야 한다는 것과도 같은 뜻이다.


쓰고 읽고만 중요한 게 아니다. 문서 안에 들어간 내용은 추후에 수정 문서가 또 작성되기 전까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이행서약서 같은 거다. 안 지키면 감사부서에서 감사를 받아야 한다. 업무 불이행으로. 그래서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고민이 많은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공무원 세계 정말 답답하지 않은가. 신속함이 무엇보다 중요한 첨단의 시기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 않은가. 역시 비효율 극치의 집단이라더니 역시나구만. 이럴 수 있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도대체 왜 이래야 하지? 왜?' 병은 입사한 뒤 6개월 정도가 지난 후 고쳐지게 되었다.


일단. 6개월 정도 문서를 쓰다 보면 문서라는 게 얼마나 확실하고 정확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인지 알게 될 것이다. 문서가 정확하면 서로 오해할 일이 없다. 그것이 자세하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결재자는 훗날 딴 말을 할 수 없고, 작성자는 문서대로 일을 실행하면 된다. 사람은 바뀌어도 문서는 남는다. 쉽게 말해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상황이 없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혹은 "척하면 알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 , 제대로 쓰고 제대로 읽기만 하면 억울할 일이 없다. 문서대로 해! 문서대로! 정말 그렇게 한다.


때문에 공직 생활에서는 문서 작성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기똥찬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그것을 문서로 설명하고 표현해내지 못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내가 기록적인 성과를 냈어도, 그 사실을 만 천하가 다 알고 있어도, 문서로 남기지 않았으면 안 한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런가. 공무원의 세계에 들어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국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만드는 일에 능숙하다. 공무원 시험에 국어 과목이 있어서 일수도 있고, 업무에서도 글쓰기가 생활화되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공무원의 글쓰기 능력은 대한민국 대기업 근로자의 평균보다는 높을 것으로 본다. 가끔 낯선 한자어가 포함되어 깜짝 놀랄 일이 많긴 하지만 잘못된 사용은 아닌지라 틀렸다고 하긴 어렵다.


자. 공무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여 체크해보자. 조금 오버하자면 공무원은 평생 필담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갖추어야 하는 기술은 그것을 신속, 정확하게 하기. 상대방과 뜻이 통했는지 확실하게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무원이 안성맞춤이다. 문서작성 기술이야 배우면 되는데, 이 부분은 성격적인 부분이라 한 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물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공무원이든 기업인이든 조직 생활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조직생활의 기본소양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방법이 직장마다 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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