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기업 사원은 공무원 9급과 같다.
차별은 없애야겠고... 평가는 해야겠고...
나는 행정공무원 6급에 경력 채용되었다. 공무원 채용은 급수를 미리 정해놓고 공표하는데, 지원자의 경력이 아무리 길고 화려하다고 해도 급수는 바뀌지 않는다. 달라질 수 있는 건 호봉이다.
합격 당시 나는 대기업 10년 차에(만 9년) 과장 1년 차였다. 인사혁신처에서 공고하는 민간경력채용(흔히 민경채라고 한다.) 5급에 지원하기 위해선 10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한데 나는 약 1년이 모자랐다. 1년을 더 기다렸다가 5급에 도전해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박사 학위나, 전문 자격증을 소지한 게 아닌 이상 지원 자격만 갓 넘어서는 왠지 합격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6급의 직급이면 아쉽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원했다.
자 그럼 직급은 됐고. 이제 월급을 생각해보자. 공무원은 1년 단위로 호봉이 오른다고 했지. 나는 10년 차의 직장인이므로 6급 10호봉이겠네. 그리고 공무원 봉급표를 찾아봤다. 아... 6급 10호봉... 현재 받는 연봉에 비해 30% 정도 낮은 연봉이 예상되었지만... 평생직장이라니까... 시간이 지나면 봉급 인상과 함께 호봉도 오르겠지... 50세 이상부터 좋을 거야... 임원 달지 않아도 마음 편히 월급 받으며 살 거야... 하며 의미 없이 6급 20호봉은 얼마인지, 승진을 하면 5급인데 5급 20호봉은 얼마인지 찾아보며 10년 뒤 나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런데 막상 입사해서 호봉을 받아보니 나는 6급 6호봉.
띠용... 4호봉 차이면 봉급이 약 40만 원 차이가 난다. 연간으로 치면 500만 원. 돈도 돈이지만 저 호봉을 따라잡으려면 4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낸 서류가 반영되지 않았나, 뭔가 누락된 것이 있나 싶어 담당자에게 어찌 된 일인고 물어보니 이것도 계산법이 있었다.
이게 <경력경쟁 임용 예정 계급별 경력 기준>이 법령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 내용으로 보면 민간근무 경력 사원은 9급에서 시작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일반적인 기업의 직급 체계로 본다면 사원 = 9급, 대리 = 7급, 과장 = 6급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만약 대리로 입사했으면 7급에서 시작했다고 보고 과장에서 시작했으면 6급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무원은 승진을 할 때마다 1호봉씩 깎이는 규정이 있는데, 그 계산법에 따라 나는 9급에서 6급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고 3호봉이 깎였다.
또한, 두 달의 인턴 기간과 두 달의 신입사원 입문 교육도 업무 기간으로 산정되지 않았다. 즉, 사원이라는 정식 명함을 받고 부서에 배치된 날부터 경력으로 인정받았다. 결국 나는 만 9년 2개월을 일했지만 이것 저것 빼고 일할계산한 것도 빼고 해서 만 8년 8개월을 일한 것으로 되어 6급 6호봉을 받은 것이다. 물론 네 달 뒤에 개월 수가 채워져 만 9년의 경력이 되어 7호봉으로 올라갔지만 솔직히 이런 계산법을 미리 알았다면 이직을 조금 더 고민해봤을 수도 있다. 단순히 몇 십만 원의 문제가 아니다. 4호봉 차이는 4년의 시간과 같다.
아... 어떻게 대기업 사원을 9급으로 볼 수 있지? 최소 7급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이건 아닌데... 생각하던 중. 아! 나 진짜 공무원이 되었구나!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바로, 공무원의 경력 산정에서 고려되는 건 일을 시작한 직급과 일한 시간일 뿐, 회사의 규모는 전혀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공무원 경력채용에서는 대기업에서 시작한 사람과 그 회사의 납품회사에서 시작한 사람과, 그 납품회사의 하청회사에서 시작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다. 사원으로 시작했으면 똑같이 9급으로 본다. 만약에 하청회사에서 과장으로 시작했고 그것을 인정 받은 사람이라면 대기업에서 사원으로 시작한 사람보다 높은 호봉을 받을 수도 있다. 승진에 따른 호봉 감산이 없으므로.
내가 대기업에서 배워온 노하우가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직원 열댓 명인 회사에 다닌 사람과 똑같은 취급을 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든다면 공무원을 하지 않길 바란다. 공무원의 세계란 이런 곳이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는 곳이다. 현실을 너무 반영하지 않은 것 아니야? 오히려 이게 역차별 아니야? 너무 이상적인 거 아니야?라고 해도 그렇다. 정성적인 평가는 최소한으로 한다.
비슷한 예로 공무원 채용에서 출신 대학에 따른 차별도 전혀 없다. 이건 요즘 기업 채용에서도 마찬가지긴 한데 공무원은 조금 다른 것이 학벌은 죽었어도 학력은 살아있다.
경력 공무원은 학력별로 지원 자격이 달라진다. 그런데 학사, 석사, 박사로 나뉠 뿐 어느 학교에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울대 학사보다 지방대 석사가 더 높은 평가 점수를 받는다. 내가 하버드 대학교 박사인데... 어깨를 으쓱해도 국내 어느 대학 박사랑 같은 점수를 받는다. 과탑을 하고 높은 학점을 받았어도 의미 없다. 나중에 면접 등에서 어필하는 정도가 다르긴 하겠지만 논문의 질도 크게 의미가 없다.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정량 평가가 중요하다. 이런 곳이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 발을 들인 이상 6호봉을 받았다고 해서 아쉬워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속으로 중소기업에서 이직했으면 9급으로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기업인데, 그룹 공채로 입사했는데, 내가 기획해서 론칭한 서비스가 몇 갠데, 어떻게 9급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어? 이렇게 생각했기에 아쉬웠던 걸 수 있다. 여전히 남아있는 싸제 마인드로. 이제 이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자. 정리해보자. 경쟁 속에서 스펙 쌓고 야물딱지게 인생을 설계한 사람들이여. 공무원으로 살려면 그거 다 벗어던지고 살 각오를 하라.
내가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는데 왜 칭찬 안 해주지? 나는 정규직인데 왜 계약직이랑 같은 점수를 주지?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구글이랑 협업한 건데 얼마나 대단한 건데 왜 가치를 몰라주지? 이런 생각은 그냥 마음속에서 하라.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당신의 직급으로.
반대로 뭔가 기회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여. 내가 학점도 안 좋고, 따 놓은 자격증도 없고, 취업도 하긴 했는데 정말 어두운 터널에 들어 있는 느낌인가. 공무원은 그걸 극복해낼 수 있는 기회다.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당신의 직급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기업 채용 서버엔 아이템빨로 무장된 이들이 많이 온다. 현질을 했든 밤새워 노력을 했든 뭐든 그건 모르겠다. 그나마 공무원 채용은 노템전으로 볼 수 있다. 에너지 게이지를 풀로 채우고 덤비면 누구나 해볼 만한 서버다. 자신에게 유리한 서버가 무엇인지 잘 따져보고 로그인하길 바란다. 아 나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