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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유지인 Oct 14. 2021

8. 입맛 다른 고객이 5000만 명

유리멘탈은 다시 생각해보세요.

나는 공무원이 되기 전 방송통신회사에서 일했다. 2007년에 입사해 2016년 퇴사하기까지 회사의 가입자 수는 20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두 배가 늘었다. M&A를 통해 몸집을 불려 나간 케이스긴 한데 어쨌든 업계 1위 회사에서 일해보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선도 기업의 이미지를 갖게 되면서 선진 서비스를 도입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이자 자부심 같은 게 생기니까.


그런데 고객의 수가 늘어날수록 힘들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민원 대응. 나는 영업팀이나 고객만족팀에서 일한 건  아니었어서 직접적으로 민원인을 응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홍보팀에서는 기업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위기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고민해야 했기에  민원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고객이 어느 부분에서 불만족을 느꼈고, 그 불만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였으며, 관련 부서에서 어떻게 대응을 했고, 이 민원이 어떤 식으로 확산될 것인지, 이것이  기업 이미지에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파악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민원 관련 업무를 보면 볼수록,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니... 이렇게 입맛이 모두 다르다니... 하고 놀라는 일이 많았다.


고객이 없으면 회사도 없다는 전제 하에, 회사는 최대한 고객의 입맛에 맞게 서비스하려고 하지만(계속해서 돈을 내게 하려고 애쓰지만)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객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니까 돈 값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긴 한데, 비용과 만족의 등가 관계를 맞추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사람마다 쓰고자 하는 비용의 범위가 다르고, 원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서비스 개선 등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면 땡큐지.  


문제는 밑도 끝도 없이 "나 기분 나빠!"를 외치는 민원.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백 번을 말해도 "내 기분이 아직 풀리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민원은 어찌해야하나... 참 어려웠다. 그래서 서비스 정신도 정신이지만 어느 정도의 정신무장과 맷집도 필요했다. 견뎌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콜센터는 말할 것도 없고, 고객 접점에서 일하는 영업팀이나 CS팀 직원들은 과격한 민원을 받아내는 일이 월급값이라는 말도 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일단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고 상대방의 화를 달래줘야 다. 가장 억울한 건 내가 한 일이 아닌데, 그 조직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송하다고 해야하는 것.


그래서 민원 응대 부서는 감정 노동이 심하기 때문에 스탭 부서에 비해 퇴사율이 높다. 베테랑 직원들은 각자의 노하우로 내성을 쌓아 견뎌내곤 했는데, 내가 이런 짓까지 해봤어! 라며 황당한 사례들을 웃으며 이야기할 때마다 난 씁쓸한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웃을 일은 아니었어서.


자 여기까지는 기업에 관한 이야기.


그래도 기업에서는 악성 민원인을 대상으로 고객 포기를 최후의 보루로 삼는다. 기업에서는 모든 게 계산이다. 고객이 없으면 회사도 없고 내 월급도 없다는 전제가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이유라지만, 이것 또한 계산에 의한 것이다. 즉, 고객의 요구가 무리라고 판단되면 기업은 고객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바이바이. 바로 이 부분이 기업인과 공무원 가장 큰 차이다.


국가 공무원은 5000만 명의 고객에게 서비스를 한다. 서울시 공무원은 약 955만 명, 경기도 공무원은 약 1350만 명의 고객에게 서비스를 한다(202110월 기준). 400만 명 고객을 대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숫자다. 사이즈가 큰 만큼 모두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예를 들어 산속에 살고 있는 국민, 외딴섬에 살고 있는 국민도 대도시에 살고 있는 국민과 똑같은 서비스를 받도록 해야 하고, 적어도 본인이 원할 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상황을 파악하고 기획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부채장수와 우산장수처럼 같은 서비스라도 누군가에게는 호재일 수 있는 정책이 누군가에게는 악재일 수 있다. 최대한 많은 국민이  웃을 수 있도록 고민하지만 누군가에게 빛이 되는 정책이 누군가에게는 어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세상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신묘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밤을 새우고 머리를 굴려 기똥찬 정책을 내놓고 '아... 완벽해!' 생각이 들었어도 좋아하지 마라. 어딘가에서 "내 피 같은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일을 이 따위로 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걸 받아내야 한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견뎌내야 한다.


공무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행정력이 중요하다. 때문에 공무는 효율이 우선되지 않는다. 효율은 결국 누군가의 서비스 배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가치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비효율적인 일을 계속 이어갈 수도 없는 이니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살면서 늘 효율을 따지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시간 투자 대비 좀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가성비 좋은 물건을 사려고 인터넷을 뒤지고.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생각해보고. 어떻게 해야 적은 노력으로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삶을 살았는데 공무원은 그러면 안 된다. 아무리 회사에  득이 되지 않는 고객이라도 모든 고객을  똑같이 생각하고 모두를 다 안고 가야한다. 그게 기본 전제여야 한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 중에 본인이 유리 멘탈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내가 평생 불만을 받아내며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 일단 공무원에게는 민원 응대 업무가 기본 업무로 깔려 있다. 어느날 다짜고짜 욕을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만나게 될 것이다. 공무원은 늘 혼나는 사람이다. 고객에게 혼나고. 고객에게 혼나면 왜 그 고객을 소외시켰느냐고 상사에게 혼난다. 이게 최선입니까?


공무원은 헌법 제6조,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로 명시되어 있다. 

5000만 명의 고객을 견뎌내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진다.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공무원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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