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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유지인 Oct 20. 2021

10. 나의 업무가 곧 대한민국의 역사

그래서 잊혀질 권리 따위는 없다. 

앞서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고 이야기한 것과 이어지는 내용이긴 한데, 


공무원이 되고 나서 신기했던 일 중 하나는 누가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이 한 일은 모든 것이 기록되고, 공유된다. 즉, 대한민국 모든 공무는 매일매일 작성되고 누적된다.


물론 개인정보나 민감한 기밀사항이 포한된 문서는 비공개로 하거나, 볼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해서 설정하긴 한다. 하지만 모든 문서는 대국민 공개가 원칙이다. 


처음 공무원이 되고 업무 파악을 할 때, 문서를 열람하는 일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 왔는데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그래서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예요?"라고 묻고 다니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나이도 많고 직급도 어지간히 찬 사람이. 다행히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련 문서를 읽다 보면 업무 히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다. 


아... 이 사업의 이름이 이때 이런 이유로 변경되었고 그 전에는 이런 이름이었구나. 담당자가 언제 누구로 바뀌었구나. 어느 예산을 사용한 것이고 이러한 근거로 진행된 사업이구나. 궁금했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편리한 기록물이라니. 


그러데 과거 문서를 읽고 있는데 왜 소름이 돋는가. 뭐야. 나도 내 이름이 박힌 보고서를 이렇게 남겨야만 하는 것인가. 훗날 누군가가 내가 쓴 문서를 열어 보면서 "아... 이게 무슨 말이야... 엄청 똑똑한 척하더니 더럽게 못쓰네..." 이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아... 무서워. 


신속한 커뮤니케이션이 생명인 회사에서는 문서를 작성할 시간에 먼저 실행하라고 말한다. 간단한 것은 구두로, 결재권자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전화나 메신저를 통해 보고하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업무의 세세한 것이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그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 궁금하면 그 일을 담당하던 직원을 찾아가 물어봐야 하고, 혹 그 직원이 퇴사를 하여 연락하기가 애매할 경우엔 그 주변에 있던 사람을 수소문하여 퍼즐을 꿰맞추어야 한다.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써도 알 수 없으면 그냥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이러면 된다. 일은 좀 많아지겠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새로 가자. 리셋 모드. 


공무원은 그렇지 않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문서와 메모라는 시스템에 모든 것을 기록한다. 일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문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엄청 쏟는데, 덕분에 업무 인수인계가 조금은 수월하다. 어느 날 갑자기 뚱맞은 업무로 배치가 되더라도, 문서를 검토할 시간만 주어진다면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막막하진 않을 것이다. 일단, 하루 날을 잡고 앉아서 과거 문서를 쭈욱 보자. 무슨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것처럼 과거의 일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공무원에게 잊혀질 권리 따위는 없다. 내가 하는 일이 곧 역사가 되기 때문에 문서를 작성할 때마다 '아' 다르고 '어' 다름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 아 피곤해. 문서마다 보관 연한이 있지만 잘못된 문서를 남겼을 경우엔 되돌릴 수가 없다. 내 손을 떠난 문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내 이름표를 붙인 채로 공공재가 된다.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남기면 후임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와.. 문서가  한 편의 드라마 같아요."라면서. 물론, 보고 있어도 무슨 말인지... 몇 번을 곱씹어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문서들도 많은데 이런 문서를 남기면 밤마다 이불 킥을 하는 부끄러운 역사로 남을 것이다. 아.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움으로 느끼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물론,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문서가 최종적으로 기록이 되기 전에, 검토자와 결재자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혼이 날 테고, 여러 번 수정 과정을 거치게 될 테니까. 원래 보고서는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 최최최최종. 진짜최종. 파이널. 파이널최종. 이런 식으로 키워가는 거다. 맨 마지막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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