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작은 책방, 그리고서점 이야기(3)
전편
https://brunch.co.kr/@redmanteau/236
작가는 종신직이다. 책 한 권을 낸 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거나 혹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저서를 앞세우는 자리에 서면 언제든 작가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조금 쑥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 “당신의 마지막 책은 10년 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 작가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2023년에 한 권, 2025년에 한 권의 책을 출간해서 2년에 한 번 꼴로 책을 냈다. 하지만 글을 쓴답시고 작가라 불려야 하는 자리에 서면, 여태 어색하다. 부디 날 부른 게 아니길 바라며 ‘작가님이 계셔? 어디에?‘ 하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이고 싶다. 감히 내가 그 이름을 가져다 써도 되는 걸까. ‘자가’ 나 ‘작‘ 정도로 ‘작가’보다 작은 단위의 부름을 이름 뒤에 달고 싶은데.
훌륭한 모든 작가는 충실한 독자 이기도 할 것이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따라 걸으며 쌓는 창작의 내공이 데려가는 곳엔 분명 글 쓰는 자들의 천국이 마련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 역시 훌륭한 이들의 글을 매일 마시고 삼킨다. 박경리 작가, 최승자 작가, 에밀리 디킨슨 작가, 버지니아 울프 작가. 그들과 나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 멀다.
물론 작가들의 작가, 그들의 글 앞에 서 있다 이내 소실점 너머로 뛰어가 글 밖으로 증발하고픈 풋내기 작가의 망설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작가가 되기 전, 글 깨나 끄적거린다며 작가의 꿈을 품었던 날들 속에서도 자주 가져본 오래된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을 ‘읽은’ 누군가, 그러니까 독자님을 마주하는 것은 묘하다. 아주 낯설다. 살며 가져본 다양한 감정의 영역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 다소 난해한 모양이다. 그것은 어느 때엔 멋쩍음의 얼굴을 닮았지만, 감격과 환희의 향도 풍기고, 아주 때때로 수치심과 분노의 뒤태도 가졌다.
하지만 언제나 독자님들의 눈을 바라보면, 그 어느 때보다 작가로서의 감각이 선명해진다.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나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전하는 순간, 나는 정말 작가가 되어버리고 만다. 독자는 작가를 비추는 가장 밝은 빛임에 분명하다.
“작가님, 저희 독서 모임에 초대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그리고 서점의 지기님께서는 우리 지역 독서 모임의 모임장 이셨다. 그리고 나의 책 <여기 다 큰 교사가 울고 있어요>를 이번 여름 독서 모임의 책으로 선정하셨다. 모임에 초대를 해 주셔서 흔쾌히 다녀왔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손길을 뿌리치고, 세상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굳이 나의 졸저를 선택하시고, 책장을 열어서 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주시다니. 결혼식에 제자들이 와서 축가를 해주다 울음이 터져 노래는커녕 흐느끼느라 졸지에 사연 많은 신부가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셨다는 독자님. 어느덧 나와 제자들에겐 재밌는 추억이 되었는데, 뭉클하셔서 그 페이지에서 오래 머무셨다는 감상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책 속에 흩뿌려놓은 단어와 문장이 누군가의 가슴에 머물며 그만의 새로운 말과 글로 자라고 있구나. 마음을 다잡았다. 쓸 때는 내 손끝에서 나왔다지만 종이에 앉힌 후 단단히 묶어 한 권의 책이 된 이상, 더는 내 것이 아닌 것들이기에. 더 잘 다듬고 바짝 키워서 내보내야지.
한낮의 작은 도서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맛있는 밥을 먹고 근사한 찻집에서 밀크티를 마신 뒤 마무리 되었다. 동네 어귀를 돌며 장소를 이동했지만, 시종일관 오랜 친구들과 너른 잔디밭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어쩌면 평생 작가라는 이름을 쥐고 있는 걸 부끄러워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의 글을 읽어주신 너무나 감사한 ’독자님‘을 만나는 건 마다하고 싶지 않다. 모순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글쓰기보다 더 소중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호박 한 뭉치를 안겨주시고, 학인 분도 보내주시더니, 이제는 독자님에게 가는 길까지 열어주신
그리고 서점 지기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