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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Apr 22. 2019

남미에서 온 과일 바구니

오르니만스 Hornimans Te mix of Flavors


나는 씹는 것보다 마시는 게 좋다. 커피, 두유, 온갖 차들은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이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마다 나에게 주는 선물로 그 나라에서 파는 차를 하나씩 사 오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남미 여행에서 데려온 티백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이 티, 오르니만스에서 나온 다양한 과일맛 패키지. Hornimans Te mix of Flavors. 선물용 과일 바구니를 티백 버전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블랙베리, 딸기와 체리, 오렌지, 레몬, 시나몬과 정향, 복숭아, 그리고 열대 과일까지. 총 7가지 매력적인 향들로 이루어진 이 패키지는 전체적으로 향이 부드럽고 포근해 따뜻함이 필요한 날 종종 찾게 된다.





쿠스코 산페드로 시장의 주스 판매대


남미의 시장에 가면 과일 주스 파는 곳을 흔히 볼 수 있다. 조금 커다란 시장에 가면 아예 생과일주스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골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그곳에선 과일 주스를 파는 곳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과일들을 잔뜩 쌓아놓아 매대를 꾸미곤 하는데,  알록달록 과일들이 한데 모아져 있는 모습은 언제나 싱싱한 과일 바구니를 연상케 했다.



  그곳에서 처음 과일 주스를 마셨던 날을 기억한다. 아니, 다른 곳에선 짧은 스페인어로도 아무렇지 않게 주문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시장에만 가면 입이 막히는 거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장소 중 가장 역동적인 기운을 가지고 있는 곳이 시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에 살짝 눌렸던 게 아닐까.


  가게를 코앞에 두고 한참 우물쭈물하는 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쫄보였나?’ 싶어 무작정 매대 앞으로 전진했다가도 언니의 힘찬 올라! 한 마디에 귀가 새빨개져 돌아오길 몇 번. 쿠스코를 떠나기 이틀 전이었나, 더 미적대다간 저 풍성한 과일들을 눈 앞에 두고도 주스 한 입을 못 마실 것 같아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시장에 들어섰더랬지.


내가 오늘은 꼭 생과일주스 마신다.

그렇게 과일 주스 골목에 들어섰다.




  쉼 없이 호객 행위를 하는 언니들 사이를 지나다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가판대 한 곳을 집어 매대 앞에 선다. 메뉴판을 보고 오늘따라 당기는 과일 주스를 골라 주문하면, 주인 언니는 앞에 진열해놓은 과일 중 하나를 집어 슥슥 썬 후 무심히 믹서기에 가는 것이다. 그렇게 부웅-하는 요란한 소리가 북적거리는 시장 한 구석에 울려 퍼지면, 어느새 과일 조각들은 제 형상을 잃고 걸쭉한 액체가 되어 눈 앞에 나타난다.


  커다란 유리잔에 주스가 담겼다.


  ”아끼!(여기!)"


  푸근한 미소에 비례하게 넉넉히 담긴 주스. 빨대를 쭉 빨면 과일에서 나온 기분 좋은 단맛과 신선함이 입 안에 내려앉는다. '흠, 역시 용기 내보길 잘했어' 혼자 마음속으로 셀프 칭찬을 해주며 호로로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한 잔이 다 비워져 간다.


  한 끼 밥을 먹은 듯 속이 든든하다. 빈 잔을 언니에게 건네며 소심하게 "델리씨오쏘.." 하니 다시 한번 넉살 좋게 웃어준다. 그 웃음 덕에 여행 내내 지속되었던 이유모를 긴장이 좀 풀렸더랬다. 아,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네. 이 기억 덕분인지 더 이상 남미에서 과일 주스를 시키는 게 무섭지 않았다.






너희 둘은 최고야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가끔 남미에서 마신 그 주스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집 근처 가게에서 생과일주스를 시켜먹어 보지만 역시 내가 원하는 그 맛이 아니야 절레절레. 애꿎은 주스만 탓하다 그때의 기억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이 티를 찾는다.


  상자를 열면 보이는 알록달록 티백들. 그 모습에 처음으로 과일주스 매대 앞에 섰던 날을 떠올린다. 점점 티백이 줄어드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지만 오늘도 참지 못하고 하나 더! 주스 맛은 아니지만 포근하고 달달하게 끼쳐오는 향에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리움을 떨쳐낸다.


  에콰도르에서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쪽으로 여행 가시는 분께 강추. 스페인어권 어딘가에서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에 만난다면 한 두팩 쟁여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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