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는 아이 - 일곱 번째 발걸음
아이는 대답했지만,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냥 타이밍이 어긋났을 뿐인데,
결국엔 서로를 오해하고, 서로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아이가 ‘안 하는 아이’가 아니라,
조금 느리게 도착하는 아이라는 걸.
오늘도
나는 나를 참으려 하고
아이는 나를 맞추려 애쓴다.
우리의 하루는
매일 퍽 웃기고, 꽤 울컥하다.
[3/25] 마음이 움직이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요
3월 25일 월요일
아침에 엄마가 말했다.
양치하고 약 먹자고.
나는 들었다.
근데 그때
핸드폰으로 리자몽을 보고 있었다.
이 장면은
어제도 봤고, 저번에도 봤고,
열 번 넘게 봤는데
또 봐도 재밌다.
나는
새로운 게 막 나오는 것보다
아는 장면을 또 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 장면에서는 실수도 없고, 놀라지도 않아도 되니까.
엄마 말은
멀리서 들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진짜로.
말은 들었는데
몸이 안 움직였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었다.
엄마가 또 말했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그 소리가
내 머릿속이 ‘펑!’ 하고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생각해야 할 일’이 됐다.
“네..”
입으로는 대답했는데
몸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엄마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나는 느리게 화장실로 갔다.
근데
왜 갔는지를 까먹었다.
리자몽만 생각났다.
다시 방으로 와서
리자몽을 또 봤다.
엄마가 물었다.
“했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엄마가 진짜 화내면서 말했다.
“양치질 했냐고!”
그제야 생각났다.
아, 그거 해야 했구나.
방금 말한 건 그거였구나.
내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하려고 했거든요! 진짜예요!”
나는
혼나기 전에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조금 늦었을 뿐인데
갑자기 너무 억울해서 화가 났다.
화를 내면서 양치질을 했다.
엄마가 또 물었다.
“약은 먹었어?”
나는
안 먹었는데
“먹었어”라고 말했다.
그냥 그 말이 먼저 나왔다.
나는 거짓말하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냥 말이 먼저 나갔다.
왜냐면 엄마가
“했어? 했어?” 자꾸 물어보니까
내 속이 막 화가 났다.
‘먹으려고 했다고! 진짜 먹으려고 했다고!’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먹었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런 식이다.
말이 마음보다 먼저 나올 때가 많다.
말하고 나서야
내 눈이 식탁 위에 남아 있는 약을 봤다.
아, 나 아직 안 먹었구나.
그제야 알았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성을 붙여서.
엄마가 화났다는 걸
나는 그 소리로 알았다.
그때
약을 먹었다.
그제야
‘이제 해야 할 일’이 됐다.
나는
엄마가 무서워서 움직이는 애가 아니다.
그냥
그때쯤 돼야
머릿속에서 일이 정리된다.
엄마 말은
처음엔 퐁퐁퐁 오다가
화내면
쾅쾅 울려서
그제야 몸이 켜진다.
나는
말을 안 듣는 애가 아니다.
나는
‘조금 느린 애’일 뿐이다.
해야 할 일은 알고 있는데,
몸이 거기까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나는
엄마가 화내야만 움직이는 애가 아니다.
나는 그냥,
조용한 말이 귀까지 안 올 때가 더 많은 아이다.
엄마가 속상한 거,
나도 안다.
안 들은 척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때는, 그 말이 나한테까지 안 온 거다.
그래서
엄마가 자꾸 화내는 걸 보면,
나도 마음이 작아진다.
나도 엄마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사실 나는,
“차분하게 말하면 아이도 차분하게 반응해요”
라는 조언을 수없이 들었다.
나도 안다.
그게 맞는 말이라는 걸.
근데 현실은 다르다.
차분하게 말하면, 윤현이는 대답을 안 한다.
두 번 말해도 안 한다.
세 번째 말하다 보면, 내 목소리가 올라간다.
그러면 그제야 “네..” 하고 대답한다.
그마저도 대답만 하고 안 움직인다.
결국 화를 낸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진짜 하게 만들려면 화를 내야 하니까.
그리고 나서 나는 자책한다.
왜 또 화냈지?
오늘은 참으려고 했는데.
나는 조용한 엄마가 되고 싶은데,
윤현이는 조용한 말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나는 나와 싸운다.
아내가 내 이름에도 성을 붙여서
“누구누구 씨”라고 부를 때,
나는 일단 숨부터 참는다.
그건 그냥 부르는 게 아니다.
그건..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우리 집에서
성 붙이는 순간은
그냥 부름이 아니라,
사건의 시작이다.
윤현이가 “먹었어”라고 말하면
나는 반사적으로 식탁부터 본다.
그 말은 진짜일 수도 있고,
아직 안 먹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대부분은 후자다.)
지금.. 아내가 내 이름에 성을 붙였다.
이건.. 벌써 늦었다는 뜻이다.
# 성 붙이면 긴장 시작
# 숨부터 참는 남편
# 사건의 시작은 이름부터
# 윤현이 말은 팩트 체크 필수
# 먹었어의 진심은 무엇
# 성까지 불리면 끝난 거야
# 대답은 했지만 행동은 없음
# 아빠는 그냥 지켜봤습니다
# 이번엔 아빠도 말 잃음
# 윤현이 편 들고 싶지만 타이밍 실패
ADHD 아동은
지시를 듣고도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뇌의 '실행 기능'이 약해
→ 말을 듣고도
→ 기억하고
→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했어?"라고 물으면 대답은 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행동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고의’가 아니라
주의와 기억의 연결이 약한 구조 때문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나는 참는 아이, 윤현이』의
일곱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혹시 오늘 이 글에서
한 번쯤 “나도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면,
또 한 번쯤 마음이 조용히 따뜻해지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윤현이에겐
큰 힘이 될 거예요.
짧은 하루의 기록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