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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Dec 29. 2021

남편의 어릴 적 꿈

선물

카톡의 '나와의 채팅' 칸에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놓곤 한다. 쓰고 싶은 글감이나 쓰지 못한 서평의 구상이 떠올랐를 때 그런 것들을 적어 두기도 하고, 초행길을 가야할 때 가는 길을 미리 캡쳐해 두기도 한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꿈을 꾼 날은 그 꿈을 기록해두기도 한다. 당장은 이유를 모르지만 그 꿈의 의미를 언젠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또한 가끔은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의 추억을 길고 긴 장문으로 적어두기도 한다. 컴퓨터 앞이라면 한글파일로 적어두겠지만 손에 든 게 핸드폰밖에 없을 때가 있으니까. 


오랜만에 '나와의 채팅'을 훑어보았다. 취미로 그린 그림들 사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그 그림들을 그리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불안감, 기쁨, 행복, 걱정, 아픔, 안심.. 여러 감정들이 살아난다. 그러다 올봄 초, 남편과의 대화를 만났다. 사실 잊고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난 남편에게, '어릴 때 꿈이 뭐야?'라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생각이 들었기에. 옆에 있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단 1초의 틈도 없이 '너의 남편'이라고 답했다. 기쁘면서도 준비된 대답이 아닐까 싶었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중2였다. 그래서 나는 '중2가 어린 건 아니잖아' 라고 어색함에 말했고 그는 '중2 때 꿈이면 충분히 어린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런 대답에 당황해서 크게 기뻐하지도 못하고 혼자 카톡에 적어둔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 말을 하던 남편은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하나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장난치는 그가 그렇게 진지하게 웃음기 없이 말하다니. 닭살스런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언제 준비했을까, 싶으면서도 순수하게 기뻐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적어둔다. 분명 그는 나중에 모르는 척 할테니까. 말한 적 없다고.


부부가 되어 함께 살며 다툴 때도 있었고 도저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해를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부부가 되어 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뿌리가 되어 주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만든 뿌리가 흙이 되고 이 흙 안에서 또 다른 뿌리가 깊이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이 흙에 많은 사랑의 양분을 심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평생 사랑하고 싶은 사람,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삶이 주신 커다란 선물이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 감사한 마음을 오래 오래 기억하고 싶어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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