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시도다.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위해 네 번째로 한글 문서를 열고 깜빡이는 커서를 보고 있다.
손글씨로 쓴 엽서와 편지, 우표, 날짜, 소인 등이 “그대로” 담긴 책. 타인의 편지를 몰래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책이다. 그 점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누구와 누가 주고받은 편지일까?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은 내 연인인가요, 아니면 어제 내 우편함을 통해 그림으로 들어온 검은 천사인가요? 난 여기 계속 남아 그걸 확인할 용기가 없습니다. 이해하겠습니까? 난 당신이 내가 꿈꾸던 여인이기를 바라고, 만나 보기를 원하고, 어루만지고 싶고 함께 있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 광기에서 자라난 증오에 가득 찬 피조물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리핀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존재하는 겁니까? 당신은 내가 만들어 낸 존재입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나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리핀의 이런 질문들은 독자인 나에게도 똑같은 의문을 갖게 하며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당신은 내 그림자입니까?”
그리핀의 그녀, 사비네는 그의 그림자다.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호기심과 혼란뿐이었다. 뭐지?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커져갔다. 그리고 다 읽고도 서평을 쓸 수 없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지 않고 반납기한을 연장하고 일부러 시간을 두고 머리를 비웠다. 책상 위에 올려진 이 책과 내 머리가 줄다리기를 하는 듯했다.
다시 책을 펼쳤고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구절들을 평소처럼 워드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읽으며 서평 쓰기를 시도했다. 그 중 지금이 네 번째 시도이다. 지금에 와서 내린 결론은, 그리핀의 그녀는 ‘그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사피네는, 그의 그림자이며 그의 자아이다.
“지금의 내 모든 행위들은 자기 반성의 흐느낌입니다. 나는 철없는 아이 같습니다. 난 왜 어른이 될 수 없는 걸까요? 진지한 질문입니다만, 혹시 그 답을 알면 대답해 주십시오.”
그리핀은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가끔씩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녀는 그런 그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당신이 지금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게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해요. 난 당신이 방종에 빠졌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이 여행은 당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행이에요.”
우리가 때때로 아프고 방황하고 고민하는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있다. 살아 있기 때문에 햇볕을 받으면 자라기도 하고 그늘지고 추위가 찾아오면 얼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움직임으로 인해 늘 방황한다. 고민한다.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또 어느 날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진폭의 감정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신호이다. 그런 진폭의 감정이 괴로울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난 13살 때, 당신의 손이 백지 위에서 춤을 추며 영혼의 순결한 면면을 그려내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내 상상력을 총 동원해 당신을 사랑해 왔어요. 너무도 깊은 곳에서 당신을 원했기 때문에, 내 몸은 고통과 기쁨으로 노래를 불렀어요. 당신은 내 강박관념이었고, 내 정열이었고, 내 환상 속 현자의 돌이었어요. 당신은 내 욕구, 내 갈망, 내 영혼이에요. 난 당신을 무조건 사랑해요. 내 말 들리나요, 그리핀? 내가 모든 의문을 넘어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을 당신은 아시나요? 당신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어요. 난 이미 사슬에 묶여 당신 곁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아무런 혼란도 없을 거예요. 당신은 온전해질 거예요. 이제 집으로 오세요. 내게로 오세요. 내가 가진 모든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적셔 줄게요.”
철없는 아이 같은 자신을 인정할 수 없고 끊임없이 정착할 곳을 찾아 여행하는 듯한 그가, 그런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을 그의 그림자이자 그의 자아는 위와 같이 말해 준다. 무조건 사랑해요, 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아와 내가 분리되지 않은 삶.
“영원”이란 단어는 영원히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원한 사랑도 없고 영원한 신뢰도 없으며 영원한 안식처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원’이란 단어를 기대하게 된다.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사랑. 영원히 함께하고 영원히 기댈 수 있고 영원히 이해받을 수 있는 관계.
“영원”은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런 영원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자아”뿐이 아닐까.
“그리고 잊지 말아요. 내가 우리들 운명선의 한 쪽 끝을 잡고 있다는 사실 말예요. 난 절대 당신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나는 나로 살고 싶다. 나의 모습 그대로 살고 싶다.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그 사람 모습 그대로를 보고 싶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나의 바람은 그저 이기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들과 있을 때, 마음의 교류를 느낀다. 그 마음의 교류가 주는 따듯함과 안정감, 신뢰감을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중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느낌에 대한 집착을, 나는,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