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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사람 Sep 08. 2021

술과 바닐라, 정한아

정한아 작가님 책은 친밀한 이방인을 읽어봤었는데 올해 5월에 나온 신간인 단편소설 술과 바닐라도 전체적으로 너무 좋다. 책은 내용만 좋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옛날에나 통했던 것 같다. 아크앤북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인데 인생 책이라며 재열풍이 불고 있는 오래된 베스트셀러는 이제 신기하게 책의 표지도 가구나 가전제품처럼 컬러를 고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바닐라 색 표지에 푸른 글씨라니 완벽에 가까워서 책의 표지도 독서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서 제법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골드 맨션이라고 제목을 짓고 102호와 201호 그리고 302호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술과 바닐라는 각각의 단편에 있는 주인공들이 같은 맨션에 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내가 생각했던 구상과 비슷한 장편소설로 이미 조남주 작가님의 사하 맨션이라는 책이 나와있는 걸 발견했다. 동네서점에서 잠깐 본거라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다.


책을 읽으며 또 한차례 공상에 빠진다. 작가님이 우릴 가엽게 여겨서 손수 적으신 손편지를 책으로 만든다면 딱 이 책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거울을 비춘 듯 심각하게 비슷할 리 없잖아. 어디 카메라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결국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옛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수긍을 해야 하나요.



우리는 대부분 결혼으로 시작되고 이어진 사람들이기에 영원의 약속에 대한 관심은 혼자를 선택하던지 아니던지 간에 모른 척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우리의 부모님이 결혼하지 않았거나 사랑의 탈을 쓴 원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기실 부재의 이유가 명확함과 동시에 그 때문에 결론적으로 우린 일정 부분 남자와 여자의 결혼생활 안쪽 또는 바깥쪽에서 있는 것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있잖아. 결혼은 유리컵 가득 흘러넘치는 일상을 술잔으로 덜어내는 일이야. 넘쳐흐르는 것들을 몸 안에 숨겨진 풀장에 가둬두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러다가 어느 날엔 방 안쪽에 물이 가득 찰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말하는 건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고 상대도 들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배수구를 찾아내서 욕조의 마개를 빼낸 뒤 방안 가득한 물을 한강으로 흘려 내보내야만 하고 흐르는 것들이 흐르지 않게 돠는 일들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표백제 냄새가 진동하는 물이 가득 찬 방 안에서 물속에만 영원히 있을 순 없어. 때론 어떤 이들을 평온을 견디는 생활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없지 않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상에는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서 좋고 나쁨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우리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날씨들을 가끔은 우산이 없이도 돌파해야 하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염 작가님과의 대담도 좋았다. 두 분의 대화가 책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이를 길러내는 일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고약하지만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라는 명명백백한 사실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결혼생활에 대해서 책을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으며 비혼과 이혼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임이 분명하다. 우리에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어디에든 어떤 패턴으로든 존재하니까. 평범한 매일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기분으로 내일을 잡아당겨 창틀에 놓아두고 서서히 밤을 맞이하는 일과를 아낌없이 또 망설임 없이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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