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는 마야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좁았다. 그러나 두 어린 거신과 아기별 하나가 움직이기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마야는 알 수 없는 통로를 걷는 것보다도 오피디아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의문스러웠다.
“할 말 있어?”
앞장서서 걷던 오피디아가 마야의 시선을 느끼고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야는 잠시 망설였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야?”
마야의 물음에 오피디아가 걸음을 멈췄다. 마야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오피디아가 기분 나빠할까 걱정했지만, 마야의 예상과 달리 오피디아에게서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네 별…….”
오피디아가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였다. 마야는 참을성 있게 오피디아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걔……. ‘연구실’에 있어.”
마야가 눈을 찡그렸다. 연구실이라는 건 마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연구실? 그게 뭔데?”
“제 1 하우스 애들 말이야. 걔네가 하우스를 졸업하면 어디 가는지 알아?”
“글쎄, 걔네들은 대부분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잖아”
“그럼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
“음, 아니. 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들었어.”
마야의 대답에 오피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안색이 나빠 보였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걔넨 연구실에서 일해.”
“그러니까 그게 뭔데?”
“별들을 고문하는 곳이야.”
“뭐?”
마야가 놀라 소리쳤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오피디아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아직 다섯살 정도 였을때 우리 하우스에 날 잘 돌봐주는 언니가 있었어. 당시에 언니는 열 살쯤이었는데, 갑자기 1 하우스로 가게되었지. 1 하우스로 간다는 건 특출나게 총명하다는 의미잖아? 그래서 나는 언니랑 헤어지는 게 아쉬우면서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잠깐, 그렇게 어렸을 때 일을 잘 기억해? 대부분은 기억 못 하지 않나?”
“지금 그게 중요해?”
마야의 질문에 오피디아가 눈을 흘겼다. 그 표정이 평소의 오피디아 같아서 마야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언니가 며칠 밤마다 한 번씩 날 찾아오는 거야. 알고 보니 ‘탈라리움’인지 뭔지를 이용해서 요람의 틈새를 알아낸 모양이더라고. 하트를 중심으로 요람 곳곳에 쩍 하고 깨진 균열 자국 같은 틈새들이 있다고 했지.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처럼 말이야. 언니 말로는 마망도 이 길은 모르신다는 것 같더라고."
오피디아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언니는 하우스에 올 때마다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려줬어. 1 하우스 애들은 졸업하면 '연구실'이라는 곳에 간다던가, 그런데 걔네들도 졸업 전까지는 자기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모른다던가 하는 얘기들 말이야. 사실은 기밀들이었는데, 언니는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인지 나에게라도 그런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 같아. 1 하우스에서도 뛰어난 몇몇은 하우스를 일찍 졸업하고 바로 연구실에 들어간댔는데, 언니가 그런 경우였거든. 하우스를 옮긴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연구실에 조기 투입되었으니 힘들었나 봐. 그런데…….”
오피디아는 머뭇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어느 날 밤에 언니가 넋이 빠진 얼굴로 날 찾아왔어. 걱정이 되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연구실에서…… 끔찍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거야. 연구를 위해 별을 고문한다고 했지. 특별히 강한 힘을 가진 별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는데, 도중에 산산조각 나는 별들도 봤댔어. 하지만 난 언니가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별을 고문한다고? 게다가 강한 힘을 가진 별을? 보통 그런 별은 루카생산률이 높은 별을 말하는 거잖아. 왜 아깝게 그런 별을 죽이겠어.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고, 그 뒤로 언니는 찾아오지 않았어. 솔직히 처음엔 서운했는데……, 이젠 그냥 믿어줬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왜냐면…….”
오피디아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랑이 조용히 오피디아에게 몸을 기댔다.
“작년에 언니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어. 하우스 데이에 찾아왔던 선배 중 하나가 몰래 내가 알려줬지. 연구실의 존재를 알리는 건 여전히 기밀인 것 같았지만 선배는 내가 이미 연구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야. 선배가 말하길, 자기는 졸업을 하고 연구실에 들어갔는데 언니가 없었대. 알고 보니 자기가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 해에 언니 스스로 숨을 끊었다는 거야. 그런 죽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평범한 죽음은 아니잖아. 그래서 연구실내부에서도 쉬쉬했던 것 같더라. 하지만 그 선배는 나랑 언니 사이가 아주 좋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었대. 나는 믿을 수 없었어. 어떻게든 연구실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나처럼 평범한 거신은 1 하우스에 들어가는 것부터 불가능한 일이잖아. 나는 이 틈새라도 찾고 싶었지만, 언니가 일방적으로 나를 찾아온 거라 쉽지 않았지. 그래서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야.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탈리리움을 찾으려고. 덕분에 이 길도 알아냈어.”
“하지만 우리가 아카데미에 들어온 건 며칠 안됐잖아. 그런데 벌써 이 통로까지 알아냈다고?”
마야가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으며 물었다.
“넌 간절함을 가져 본 적 없어?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밖에 안 보여. 당연히 입학하고 다음 날 바로 도서관으로 갔지."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야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마야가 베베를 위해 그토록 바삐 움직였던 것은 그런 간절함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니까.
“결국 연구실 위치까지 알아냈어. 틈새로 들여다본 연구실 한쪽엔 별의 신체들이 쌓여있었지. 그걸 보니까 언니가 들려준 일들이 사실이라는 직감이 들었어. 물론 마망을 원망하지는 않아. 분명 요람에 이득이 되는 일이니까 그런 일을 벌이신 거겠지. 너도 그렇겠지만 우리 모두 마망을 존경하잖아.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고.”
“그럼…….”
마야가 손을 내밀어 오피디아의 팔을 붙잡았다. 오피디아가 놀란 눈으로 마야를 바라보았고, 마야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왜 베베를 구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뭐?”
“마망을 존경한다며. 지금까지 들은 얘기로 미뤄보건대, 베베는 연구실에 있고 아마 고문받을 거야. 그런데 그게 너에게 무슨 의미야? 네가 어떻게 베베가 연구실에 있다는 걸 아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날 돕는 건 마망에게 거역하는 일이잖아.”
마야의 질문에 오피디아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마야는 오피디아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황급히 손을 뗐다.
“그야 나는 네 별을 알고 있잖아! 네 별이 얼마나 말썽을 피워대는 골칫덩어리인지 안다고! 겨우 며칠 본 거긴 하지만, 이미 낯을 익혔는데…… 그런 별이 죽는다니, 그걸 내버려 두기엔…… 언니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그래서 꺼림직해. 네 별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꺼림직하다고!”
오피디아가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고, 얼굴을 울지 않으려 힘을 주느라 조금 우스웠지만, 그 얼굴을 보고서 마야가 느낀 것은 당혹감뿐이었다.
“솔직히 놀랐어.”
“뭐가.”
“난 그러니까… 네가 조금 차갑다고 생각했거든.”
“조금?”
“...아니 많이. 미안. 아무튼 베베를 신경 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오피디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태도가 차가운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 길러졌는 걸. 우리 하우스에서는 약한 마음을 갖는 건 용납되지 않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망의 근위대에는 3 하우스 출신이 많아. 우리 중 절반은 군인으로 길러지니까.”
“그건 몰랐어.”
“그럴 수도 있지. 애초에 다른 하우스에 대해 우리가 서로 얼마나 알겠어.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겨우 다른 하우스 출신들을 만나보는데.”
오피디아의 대답에 마야는 턱을 쓸었다.
“음, 그런데 사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럼 뭔데?”
“별은 요람의 자산일 뿐이잖아. 적어도 대부분의 거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솔직히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별을 신경 쓰는 건 이상한 일이고, 그런 이상한 짓을 하는 괴짜는 나뿐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너도 그렇고, 그 '언니'도 그렇고 별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거신이 더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워서……. 더군다나 네 말대로 네가 엄격하게 길러졌다면 더더욱.”
“솔직하게 말하면 랑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지. 그런데 얘를 만나는 순간, 별이 그 이상의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어. 네 별이 기숙사를 갉아 먹는 걸 보았을 때, 그리고 근위대에게 붙잡혀 가는 걸 보았을 때엔 애가 타더라. 왜 그랬냐면, 그 말썽꾸러기 별이 내 아름다운 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우리 베베 욕하지 말아 줄래?”
마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맞받아치자, 오피디아가 키득대며 웃었다.
“네 별이 말썽을 피운 건 사실이잖아. 그나저나 놀란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난 네가 요람에 순종적일 거라 생각했어. 4 하우스 출신답게 말이야. 그런데 넌 별을 구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잖아. 네 눈빛을 네가 볼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아주… 인상적이었어.”
“칭찬이지?”
“적어도 욕은 아니지. 네 표현대로 괴짜 같긴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래, 고마워.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을 던지는 오피디아에게 마야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베베를 어떻게 구해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