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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06. 2022

네가 세상에 싹트던 날

생명으로 가득한 이 땅과 바다에서

2021년 7월의 제주에는 이른 장맛비가 내렸다. 그 비를 뚫고 나와 남편은 물영아리 오름이라는 곳에 갔었다. 우산을 썼다가 안 썼다가를 반복하다가 비에 푹 젖어버린 채 무거워진 우비를 업다시피 정상에 올랐다.

   

물영아리 오름의 정상 가까운 곳에는 커다란 물웅덩이 같은 습지가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제주의 땅은 물을 가두기가 여간 쉽지 않아서 산에 물이 고인 모습은 정말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물이 없어 메마른 땅에 풀밭이 펼쳐진 모습이고, 비가 오는 날에는 물안개 때문에 호수의 모습은커녕 앞 사람의 모습도 볼 수가 없다고.     


우리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 없이 오름을 올랐었다. 역시나 습지에 다다랐을 때는 짙은 안개로 발아래의 물만 겨우 볼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안개가 빠르게 걷히더니 거대한 습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물영아리오름습지

병풍처럼 나무들이 둘러싼 호수에는 기다란 수풀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하얀 꽃들이 자라있었고, 그것들에는 물방울이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베이스를 채우고, 새 지저귀는 소리가 현악기의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안개 속에 가려진 습지의 생명력이 조금씩 움트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함성이 터져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대 없는 마음이 환희로 가득찼다.




다음 날에는 비가 멎었고, 우리는 제주의 서쪽으로 내달렸다. 서쪽에는 수월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화산 지층이 정말 멋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꼭 봉우리를 보고 싶었고, 남편은 늘 그렇듯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해주고 싶어 했다.     


수월봉은 사진으로 보던 그것보다도 훨씬 장엄했다. 장마 때문에 성이 난 것처럼 높아진 파도는 수없이 수월봉 절벽 아래를 때려댔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다시 바다로 회귀했다.

수월봉

세월을 간직한 지층도, 물결처럼 넘실대는 절벽의 곡선도, 검은 바위와 하얀 파도도 정말이지 멋졌지만,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수월봉의 입구에서 날고 있던 아주 조그만 나비들이었다.

     

작은 날갯짓으로 열심히 꽃을 옮겨 다니는 하얗고 노란 나비들을 보면서 나는 왠지 아기를 갖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말 아기가 찾아왔다.


아가야. 살다 보면 네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드는 날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에게는 네가 찾아온 그 날은 정말 특별했단다.     


유달리 그해 여름에는 장마가 일찍 시작했고, 덕분에 쉽게 볼 수 없는 물영아리 습지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수월봉엔 파도가 큰 소리를 내며 절벽을 부실 듯이 일어났고, 나비들은 습기 가득한 공기 속에서 쉬지 않고 날고 있었다.      


온 하늘과 대지와 바다가 엄마에게 생명이 오고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이.      


언젠가 네가 자라서 이 글을 읽는 날이 온다면, 네 생명이 싹트던 그 날은 엄마에게 너무 특별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꼭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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