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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07. 2022

태몽 이야기

인연의 시작

어릴적 엄마는 가끔 내게 태몽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왕관을 쓴 채 절벽에서 떨어져 먼바다로 헤엄쳐 나가 은빛으로 빛나는 물고기가 되어 뛰었다는 꿈 이야기도 있었고,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벽을 푸르른 담쟁이넝쿨이 온통 뒤덮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엄마는 그 태몽들을 꾼 날부터 ‘언젠가 이 아이를 먼바다로 보낼 날이 오겠구나. 이 아이가 인생에 큰 벽을 마주했을 때 잘 넘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또 내가 어떤 일을 근사하게 해낼 때면     


"그것 봐. 네 태몽이 얼마나 좋았는데. 당연히 엄마는 네가 잘할 줄 알았다.“     


라고 말해주고는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나에 대한 엄마의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뱀의 태몽을 가졌기 때문인지 우리 아기도 처음 꾼 태몽에 뱀으로 나타났다. 이제 막 임신테스트기를 통해서 임신을 확인했던 4주 즈음이었다. 아직 병원에 가서 아기집을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어릴 적 살던 집에 부모님과 동생이랑 함께 있었는데 스윽 하고 검은색 뱀 한 마리가 벽면을 타고 지나갔다. 그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생생해서 꿈속에서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엄마한테 집에 뱀이 들어왔다고, 빨리 잡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동생을 종종 부려 먹었고, 역시나 꿈에서도 직접 뱀을 잡을 생각은 못 하고 동생에게 잡아 오라고 시켰다. 곧 동생이 뱀을 하나 잡아 보여줬는데 아까 봤던 검은색 뱀이 아니라 주황색 줄무늬의 아주 작은 뱀이었다.      


"이거 아니었어! 다른 뱀이었는데. 커다랗고 검은 뱀"


그러자 동생이 눈동자까지 까만 검은색 뱀을 팔에 한가득 안아 내게 가져다주었다.      


"그래! 이 뱀이었어, 이 뱀!"


나는 이렇게 외치며 동생에게 가만히 안겨있는 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를 잡을 때 움직일까 두려웠는데, 얼마나 얌전한지 손에 잡힐 때 아무 저항이 없었다. 뱀의 머리를 잡았을 때의 그 차가운 촉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실제로는 뱀을 만져본 적도 없지만 뱀의 비늘은 분명 그런 느낌일 것 같다.


다음날 남편과 함께 방문한 산부인과에서 우리는 자궁에 동그랗게 자리 잡은 아기집과 그 안에 아주 작은 점처럼 찍힌 난황을 확인하고 왔다. 너무 작아서 심장 소리도 듣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이 아이는 내게 온 인연이 분명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임신 중기인 16주로 들어서던 10월의 어느 날, 초음파 검진을 하루 앞두고 또 한 번의 태몽을 꾸었다. 푸른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무궁화 군락이 펼쳐져 있었다. 무궁화 꽃들이 모두 활짝 꽃잎을 펼치고 있어 연분홍 단심 안의 진분홍 단심맥과 노란 암술머리까지 온전하게 보였다. 꽃 주변으로는 크고 작은 벌들이 바삐 날고 있었다.     


꽃밭 뒤로는 엄마가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는 무궁화 한 그루를 열심히 손질해서 어디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 뒤로는 커다란 설산이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엄마에게 가기 위해 꽃밭을 가로지르는데 꿀벌 두 마리가 내 가슴에 날아와 앉았다.


벌이 무서워 쫓아버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는데 만지면 쏘일까봐 차마 손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꿈에서 깼다. 꿈에서 깨고는 그 벌이 아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꿈에서조차 내가 겁쟁이인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꿈에서 깨 아침 일찍부터 병원에 가 초음파 검진을 했는데, 아기는 몇 주 새 건강하게 자란 모습으로 팔을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바로 전 12주에는 조랭이떡에 팔다리가 달린 퍽 웃긴 모습이었는데, 16주에는 제법 팔과 다리를 접었다 필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제법 사람의 모습을 갖춘 16주

그렇게 나는 검진을 하루 앞둔 날이면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궁금해하며 잠을 청하고는 했는데, 무궁화와 벌이 나왔던 꿈을 꾼 이후에는 태몽을 더 꾸지 못했다. 남편은 잠을 자기 전 자신도 꿈에서 아기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며 청을 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았다.      




아가야, 너와 나의 인연은 네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꿈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단다. 그 꿈의 기억들은 엄마에게 너를 언젠가 안전하게 품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과 믿음을 안겨주었었다.


세련된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살아보니 인연이란 어느 날 꿈에서 만난 뱀과 벌처럼 알 수 없는 우연으로 찾아와 필연이 되는 것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광활한 우주에서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우리를 과학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젠가 네가 어떤 일을 근사하게 해냈을 때, 엄마도 엄마의 엄마처럼 얘기해주고 싶다.      


"그럴 줄 알았어! 네 태몽이 얼마나 멋졌는데!"      


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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