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곧 성숙함일까?
사회는 흔히 '감정을 통제하는 사람'을 어른스럽다고 말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이며, 때로 갈등을 피하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감정을 억제함으로 자신과 관계 모두를 해치는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미숙하거나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사회에서는 개인의 감정보다 집단의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받아왔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은 우리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내면화하거나 침묵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성숙함과는 다르다. 감정은 억제된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억압된 감정은 무의식에 남아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큰 정서적 비용을 요구한다. 억눌러진 감정은 피로와 무기력으로 바뀌고, 분노가 되어 예기치 않은 순간에 폭발하기도 한다. 심리학자 폴 에크먼(Paul Ekman)은 감정 억제가 심박수 증가 등 자율신경계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생리적 반응은 장기적으로 신체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은 종종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감정을 억압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감정을 느끼는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기 때문이다. 슬픔이나 분노, 불안을 느껴도 그 감정은 곧장 무시되고 마음속 어딘가로 밀려난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어린 시절, 감정을 표현했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경험했다. “그까짓 일로 울어?” “화를 내면 나쁜 아이야.”같은 말을 들으며 감정 표현을 위험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학습시켰고, 그 결과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인식하지 못하고 살게 했다.
둘째, 감정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알지만,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혹은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 될까 봐 그것을 감추기로 결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이성적이고 차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피할 수 있다고 믿지만,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게 하며 특히 반복적으로 감정을 참는 경험은 자기감정을 경시하게 하고, 나아가 자아 존중감을 훼손시킬 수 있다.
감정을 억제하는 태도는 관계 안에서 침범을 허용하게 만든다. 경계를 넘은 순간 불쾌함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그 행동이 괜찮았다고 오해한다. 침묵은 곧 동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침범이 반복되고, 나의 감정은 더욱 무시된다.
우리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감정 발산을 위해서가 아니다. 감정은 관계에서 나의 ‘경계’를 알리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무례함을 지적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례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감정을 억제하면 나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침범이 계속되며, 존엄은 훼손된다.
감정은 말이 되어야 하고, 말은 경계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나에게 불편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시면 상처가 됩니다.” “지금은 대화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문장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방어선이 되어 준다. 감정을 즉시, 간결하게 표현할수록 오해는 줄어들고 관계는 단단해진다.
심리학자 James Gross와 Oliver John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은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사람보다 삶의 만족도가 낮고, 대인관계의 갈등이 잦은 경향이 있다(Gross & John, 2003)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면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감정을 누르면 갈등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듯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감정이 쌓이고 폭발하는 시점에서는 관계 전체가 무너진다. 감정은 즉시 표현될 때 가장 온화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관계를 안전하게 지키는 기술이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패를 갖는 일이다. 타인의 침범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더욱 분명한 언어로 경계를 알릴 필요가 있다. 감정이 말이 되어야, 침범은 멈추고, 경계는 견고해진다.
감정을 숨기지 말고, 말하자.
“지금 그 말은 저에게 상처가 됩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지키고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다.
Gross, J. J., & John, O. P. (2003). Individual differences in two emotion regulation processes: Implications for affect, relationships, and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5(2), 348–362.
Ekman, P., Levenson, R. W., & Friesen, W. V. (1983). Autonomic nervous system activity distinguishes among emotions. Science, 221(4616), 1208–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