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깼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탄식과 함께 내뱉는 아기 엄마의 한 마디에 슬며시 고개를 들어 아이와 엄마가 앉은 창가 자리를 봤다.
방금 전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쿠키와 함께 창가 테이블로 가져다 드리고 올 때만 해도, 아기 엄마가 커피잔을 카메라로 찰칵찰칵 찍으며 바깥의 풍경과 책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순간만 해도 유모차 속의 아기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아이를 깨울까 싶어 더 잔잔한 피아노 배경음악으로 바꾸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아기 엄마는 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카메라에만 담아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아련히 바라보며 한 손으론 눈을 떠버린 아기를 다시 재워보려 토닥토닥 아쉬운 몸짓을 했지만 눈떠보니 새로운 세상인 아기에게 다시 자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아예 몸을 일으켜 유모차 밖으로 나오려는 아이를 아기 엄마가 한숨을 쉬며 빼내었다.
“엄마 딱 십분 앉아 있었다. 인간적으로 커피 한 모금은 마시게 해 줘야지 않겠니?”
아기 엄마의 푸념 섞인 혼잣말을 들으며 십여 년 전의 내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제 돌 지난 아들은 유모차에 앉아 있기보다 두발로 땅을 밟고 제 의지대로 보고픈 것 만지고픈 것을 마음껏 하며 걸어 다니길 좋아했다.
두 손으로 분유를 탄 우유병을 야무지게 쥐고 빨아가면서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따라다니기에 늙은 애미의 체력은 보잘것없었고 어떻게든 아이를 잡아 유모차에 혹은 아기띠에 넣어 재우는 게 나의 막중한 임무로 느껴지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을 돌다가 문득 뭔가 조용해서 보니 아이가 스르르 유모차 안에서 잠이 든 것이 아닌가!
‘옷이고 뭐고 쇼핑은 집어치우자 빨리 커피숍을 찾아내야 해’
세상에서 가장 혼잡하고 시끄러운 공간을 찾아내라 하면 주말의 스타벅스가 아닐까 싶다.
빈자리 찾기도 힘들지만 조용히 앉아서 옆사람과 얘기하기도 시끄러운 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수레를 밀듯 잠든 아이를 실은 유모차를 체감 시속 60으로 밀고 잽싸게 빈자리 한쪽을 잡았다.
유모차를 둔 테이블 위에 기저귀 가방을 올려두고 아메리카노와 케익 한 조각을 시켰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순간인지 커피가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혹여라도 아이가 깰까 봐 조심조심 유모차 가림막을 내려서 소음으로부터 차단을 시켰다.
드디어 영롱한 검은 마법의 물 스타벅스 커피와 꾸덕꾸덕한 치즈케익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행복하고 설레이는 혼자 마시는 커피 시간.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핸드폰을 찾는데 커다락 기저귀 가방 어느 구석으로 들어가 숨었는지 잘 찾아지지 않았다.
겨우겨우 찾아낸 폰에 담은 그때 그 테이블 사진은 아직도 카카오스토리에 잘 저장되어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을 틈타 후다닥 커피와 케익을 먹으면서도 행복해 죽는 그 시절의 엄마였던 내가 참 가엽다가도 귀엽다.
15개월 정도 됐다는 예쁜 아기는 작은 발을 아장아장 거리며 조심스럽게 책방 안을 탐색했다.
아기 엄마는 아이가 넘어질까 봐 허리를 굽혀 아이 뒤를 따라다니며 귀여운 표지의 동화책을 보면 설명을 해주었다.
“혹시 음악 소리 때문에 깬 걸까요?”
“아니에요. 원래 밖에서 잘 자다가 실내만 들어오면 깨더라고요”
“아이고… 어떡해요… 커피도 못 마셨는데…”
“간만에 자길래 용기 내서 책방 왔는데 다음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아요 ㅎㅎ”
출입문 쪽에서 아기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아기 엄마는
“아니야. 추워서 나가면 감기 걸려요”
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계속 바깥을 가리킨다.
내가 봤더니 옆의 미술학원에서 핼러윈데이라고 주황색 풍선들로 장식한 것들 중 하나가 떨어져 출입문 쪽에서 낙엽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기들은 풍선과 비눗방울 그리고 분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 아이가 이미 그것들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머리에 각인된 것처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아… 저기 풍선이 가지고 싶은 거구나! 아줌마가 가져다줄게!”
나는 풍선을 주워다가 물티슈로 닦아내어 먼지가 더 없나 확인한 후 아이에게 풍선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기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엄마 종아리 뒤로 가서 숨었다.
“낯을 많이 가려요… 고맙습니다 해야지”
아기 엄마가 대신 전해준 풍선을 아기는 두 손으로 가득 안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아기와 눈을 마주치더니 번쩍 들어 올려 커피잔이 있는 창가로 갔다.
그리고는 아직 얼음이 채 다 녹지도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속이 탄 마음을 진정시키기라도 한 듯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주섬주섬 예전의 내가 가지고 다녔던 기저귀 가방과 비슷한 크기의 가방을 싸더니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앉혔다.
“다음에 엄마 혼자 다시 와야겠다. 이궁…이 녀석아”
아기는 얌전히 유모차에 앉아 가슴에 안고 있는 풍선 너머로 엄마의 아쉬운 표정을 위로라도 하듯 함박웃음을 지어주자 엄마도 한 껏 웃어주며 겉옷을 걸쳐 입었다.
유모차가 빠져나가기 살짝 좁은 통로를 들어올 때처럼 낑낑거리며 살살 밀어 나가며 아기 엄마는 눈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에 커피 한 잔 천천히 드시러 오세요”
2022.10.23
엄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