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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Sep 06. 2020

풀지 못한 숙제

아빠, 생신 축하해요

누구나 마음속에 풀지 못한 숙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소한 것이라 생각해서 '에이 하루쯤 날 잡고 해 버려야지.' 쉽게 생각하다가도 막상 실천하려면 찌나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들이 생겨나는 건지. 숙제는 또 무기한 연기되고 만다. 세상 제일가는 '미루기' 대마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누구도 나에게 손가락질하거나 잔소리하는 사람 없지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그래서? 진짜 언제 할 건데?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려고?'


머릿속이 복잡해져 올 찰나,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내 마음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사실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부끄럽게도, 나에게 이 숙제는 <아빠 생신상 차려주기>였다. 올 해의 아빠 생신이 더 마음 쓰였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작년 말 정년퇴직을 하고 여가 시간이 많아진 아빠의 모습에서 다양한 감정이 들었다. 얼굴 볼 시간이 많아져서 반갑고 좋다가도, 어쩐지 가끔씩은 헛헛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가끔씩 지루해 보이는 아빠의 표정 스칠 때면 '아차...' 싶었던 것이다.




아기의 밥을 짓고 다음 반찬을 고민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된 나는, 끼니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끼니를 챙기는 자의 역할 얼마나 숭고하고 고된 일인지. 나 어렸을 적 엄마 아빠께 당연히 받기만 하던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고 아른거렸다.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한때 아빠가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자주 만들어 주셨던 마가린 듬뿍 때려 넣은 김치볶음밥과, 설탕 을 두껍게 입은 계란 토스트가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 그 추억을 안고 는 나였기에 이번 숙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38년간의 왕성한 사회생활을 내려놓고 다음 삶을 준비하는 아빠의 속내를,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저 그의 다음 스텝을 찬찬히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고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봐 주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지금 행복한 것. 이런 생각의 꼬리들이 올 해의 아빠 생신상을 차리게 한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숙제는 또 무기한 연기되었을지 모른다.






'당신의 탄생일을 당신의 딸이, 가족들이렇게나 마음 다해 축하하고 있어요.' 하는 메시지를 아빠에게 주고 싶었다. 아빠도 사랑받고 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아빠가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안 하던, 일감이 많던 조금 줄던, 나에게는 변함없이 소중한 아빠니까. 세상에 태어나 처음 당신을 위해 끓여본 오늘의 미역국이 쑥스럽고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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