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해니 Sep 06. 2020

풀지 못한 숙제

아빠, 생신 축하해요

누구나 마음속에 풀지 못한 숙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소한 것이라 생각해서 '에이 하루쯤 날 잡고 해 버려야지.' 쉽게 생각하다가도 막상 실천하려면 찌나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들이 생겨나는 건지. 숙제는 또 무기한 연기되고 만다. 세상 제일가는 '미루기' 대마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서 누구도 나에게 손가락질하거나 잔소리하는 사람 없지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그래서? 진짜 언제 할 건데?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려고?'


머릿속이 복잡해져 올 찰나,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내 마음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사실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부끄럽게도, 나에게 이 숙제는 <아빠 생신상 차려주기>였다. 올 해의 아빠 생신이 더 마음 쓰였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작년 말 정년퇴직을 하고 여가 시간이 많아진 아빠의 모습에서 다양한 감정이 들었다. 얼굴 볼 시간이 많아져서 반갑고 좋다가도, 어쩐지 가끔씩은 헛헛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가끔씩 지루해 보이는 아빠의 표정 스칠 때면 '아차...' 싶었던 것이다.




아기의 밥을 짓고 다음 반찬을 고민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된 나는, 끼니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끼니를 챙기는 자의 역할 얼마나 숭고하고 고된 일인지. 나 어렸을 적 엄마 아빠께 당연히 받기만 하던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고 아른거렸다.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한때 아빠가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자주 만들어 주셨던 마가린 듬뿍 때려 넣은 김치볶음밥과, 설탕 을 두껍게 입은 계란 토스트가 그렇게 생각이 나더라. 그 추억을 안고 는 나였기에 이번 숙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38년간의 왕성한 사회생활을 내려놓고 다음 삶을 준비하는 아빠의 속내를,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저 그의 다음 스텝을 찬찬히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고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봐 주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지금 행복한 것. 이런 생각의 꼬리들이 올 해의 아빠 생신상을 차리게 한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숙제는 또 무기한 연기되었을지 모른다.






'당신의 탄생일을 당신의 딸이, 가족들이렇게나 마음 다해 축하하고 있어요.' 하는 메시지를 아빠에게 주고 싶었다. 아빠도 사랑받고 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아빠가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안 하던, 일감이 많던 조금 줄던, 나에게는 변함없이 소중한 아빠니까. 세상에 태어나 처음 당신을 위해 끓여본 오늘의 미역국이 쑥스럽고도 행복했다.

작가의 이전글 아가야, 너의 첫 독립을 축하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