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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Dec 06. 2020

마음 이사

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최대한 버릴 수 있는 건 버려주세요."


이사를 할 때 늘 듣게 되는 말이다. 버릴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도 정말 많이 버렸다. 내가 버릴 물건을 현관 앞에다 내놓으면 남편은 수도 없이 물건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3년을 채 살지 않은 곳이었다. 며칠에 걸쳐 정리가 필요한 곳들을 한 구역씩 정해놓고, 필요한 물건과 불필요한 물건을 분류했다. 필요와 불필요를 나누는 기준은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인데, 그 '쓸모'의 기준이 모호했다. 모든 물건의 쓸모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아이의 성장 속도는 정말 빨라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 적다. 지금은 입지도 못할 큰 옷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당히 여유 있는 옷을 샀다고 하더라도 1년도 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이 옷을 정리하다가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밟히는 옷이 하나 있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 내 동생은 뉴욕 출장 중이었다. 동생은 조카의 탄생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에 타임스퀘어를 누비다가 디즈니스토어에 들어가서 귀여운 미키 우주복을 샀다. 나도 가본 적 있는 곳이었다. 딱히 살만한 것은 없지만 늘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던 곳. 그래서인지 동생이 그곳에서 이제 막 태어난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을 장면이 머릿속에 훤했다. 아기는 11월생인데 겨울옷을 샀어야 했으니, 정말 딱 한철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내년에 입기 위해 아주 큰 옷을 사자니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었을 테고, 당장 한두 달 뒤에 입힐 옷을 고르기 위해 동생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옷은 정말 귀여웠다. 미키마우스 크리스마스 버전을 연상시키는 옷이었다. 아이의 몸에 옷이 딱 맞아질 때까지 부지런히 입혔지만, 그럼에도 몇 번 입히지 못했다. 옷이 작아져서 더 이상 아기에게 입힐 수 없게 되어버리자 난감해졌다. 버리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버리지 않고 입지도 못할 옷을 가지고 있자니 옷장 사정은 조금 부담스러워 보였다. 옷을 처분하는 일은 동생이 보여주었던 조카 탄생의 기쁨을 일방적으로 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 옷을 보고 있자면 타임스퀘어를 활보하는 동생의 이미지가 그려졌고, 뉴욕의 한 호텔에서 조카 옷을 샀다며 이야기하다가 함께 있지 못하는 아쉬움에 눈물 훔치던 동생의 모습이 함께 연상되었다.


내게는 잠옷이 여러 벌 있다. 모유수유를 20개월 동안 한 덕에 유복과 한 몸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편애했던 원피스 잠옷이 하나 있었는데, 가지고 있던 잠옷 중에 길이가 가장 길었고 품도 낙낙했으며 단추도 여러 개가 나있어서 내 필요에 따라 옷 여밈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면이 살에 닿는 느낌이 포근하고 따뜻해서, 그 옷이 건조가 다 되면 다른 옷들은 찬밥신세였다. 나는 늘 그 옷부터 집어 들었다. 너무 유별난 편애였던 것일까. 옷에는 어느 순간부터 모유 냄새가 짙게 베기 시작했다.


'세탁을 신경 써서 잘하면 되겠지.'


몇 가지 방법을 써보았지만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존재감이 더 두드러질 뿐이었다. 이제는 그 옷을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 옷은 내게 이미 옷 이상의 의미였다. 그 무엇보다 모유수유과정 전반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였다. 그 옷은 나와 아이가 땀을 뻘뻘 흘려가며 호흡 맞추던 과정을 함께한 존재이고, 새벽에 일어나 졸음을 참아가며 했던 새벽 수유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으며, 수유 중에 환하게 웃음 지어 보이는 아이의 미소를 함께 보기도 했고, 때로는 극심한 피로에 몸져누워 있단 나를 특유의 편안함으로 조용히 감싸주기도 했다. 그 모든 얼굴이 서려있는 옷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결정하고 짐을 줄여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동생이 선물했던 아이의 작아진 그 옷도, 짙은 냄새가 배어버린 잠옷도 모두 처분했다. 작아진 옷은 그 옷이 필요한 다른 아이에게 용기를 내어 건넸고 잠옷은 미련 없이 버렸다.

  



나는 문득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마상태에 대해서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을 쥐고 있는 내가 보였다. 물건을 버리면 그와 관련된 기억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기억은 그렇게 사라질 리 없지 않나. 마음에 고이고이 남아 어쩌면 영원을 살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기억이고 추억이다.


지나간 시간들을 버리는 작업은 특정 물건만 버리는 것이 아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과거의 무성한 미로 같은 기억에서, 내게 현재 가치 있는 기억을 추려내고 앞으로 다가올 소중한 기억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현재의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현재의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만 생각하면 된다. 온갖 쓸모의 이유로 포장한 것들로 인해 현재가 희생되고 있지는 않은지 잘 돌아보아야 한다.


이사를 계획하면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처분하는 일처럼, 마음을 정리하는 일도 주기적으로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나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잘 파악해서 골라내고 미련 없이 보내줄 줄 아는 것은, 현재를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건강하고도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어쩌면 마음도 주기적으로 이사가 필요한지 모른다. 아니, 때로는 물리적인 이사보다 마음의 이사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인생에서 어느 순간에는 깔끔하게 덜어내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을 때가, 또 어느 순간에는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품으려 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이 되었다가 맥시멀리즘이 되기도 하고, 다시 미니멀리즘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물건을 많이 품어봐야 물건의 빈자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마음이 복잡해져 봐야 마음 정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느낄 수 있듯이, 기다림의 시간은 필연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전보다 비워진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결 가볍고 산뜻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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