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 임산부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책 한 권을 들고 집 앞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올 참이었다. 뒤뚱뒤뚱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음료를 시켰다. 날씨도 좋고 공기도 좋은 가을날이었다.
음료를 반쯤 마시고 있는데, 혼자 유모차를 밀며 카페로 들어온 한 사람이 보였다. 이제 곧 출산을 앞두었던 시점이라 유모차를 밀고 있는 엄마들을 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렀다. 그 엄마는 유모차 안에서 잠든 아이가 깨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아이스커피를 연신 홀짝였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큰 커피를 다 마셨는데, 거의 다 마실 때쯤 아이가 깼다. 그리고 그 엄마는 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떠났다. 유모차 밑에는 간단한 물건들을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마트에서 간단히 장본 물건들과 아이의 간식, 그리고 젖병이 보였다.
뱃속에 아이가 있지만 아직 세상에 아이는 나오지 않은 때. 그때도 엄마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그 엄마가 다녀간 자리를 보면서 막연하게 '아이가 조금 더 오래 잤다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한 것이 다였다.
그때 처음 '엄마의 삶'에 대해서 어렴풋이 생각해본 것 같다. 아이가 자는 시간에 잠시 숨을 돌리는 엄마들의 모습.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잠자코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음료를 마시는 엄마의 모습. 갓난아기를 곁에 둔 엄마의 삶은 당연히 그런 것이리라 생각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추측이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나는 정말 엄마가 되었다. 아이와 호흡을 맞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몇백 배는 더 어려웠다고 하면 될까. 매일을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는구나'라는 말을 곱씹으며 밤이고 낮이고 깨어 있었다. 이 전처럼 내가 원하는 시간에 외출해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를 돌보며 자투리 시간에 후다닥 밥을 먹어야 했고, 자투리 시간에 겨우 머리를 감고, 자투리 시간에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추리고 구매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것만 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랐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내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눕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만큼 누워있을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음식을 느긋하게 음미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내 패턴에 맞춰 시간을 잘게 쪼갤 수도, 늘릴 수도 있었고,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위주로 시간을 채워 보내면 그만이었다.
아이를 만나고 이 모든 것들이 불가능해지고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자 나는 자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아이를 보며 까르르 웃었는데, 얼마 후에는 부정적인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보란 듯이 넘나들었다.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잠시라도 들 때면 나는
'엄마가 돼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죄책감에 시달려 마음이 한순간 불편해졌다.
빠듯해진 시간과 더불어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들이 많았다. 내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아이는 불편하다고 울어댔고, 백일의 기적을 바랐지만 생후 20개월이 돼서야 통잠을 잤다. 제발 쪽쪽이를 물었으면 했는데 아이는 한사코 거부했고, 젖병에 길들여지기를 바랐는데 젖병을 들이댈수록 아이는 내 가슴에 더 집착했다. 매일이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날들이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를 돌볼 여유는 없는 빼곡한 하루 속에서 나는 뾰족해져 갔다.
아이가 이유식을 먹기 시작한 후로는 더욱 바빠졌다. 어느샌가부터 아이를 먼저 먹이고 나서 최대한 빠르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메뉴들로 내 식사를 대신했다. 주방에는 컵라면, 짜장라면, 냉동 볶음밥 등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한동안은 사람들의 평이 좋은 인스턴트 음식을 찾아서 주문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세 물려버리고, 인스턴트 음식이라면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아이의 끼니를 챙기고 나서 뒷정리를 한 후, 여느 때처럼 주방 한편에 서서 급하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대충 허기만 채우는 음식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런 거 말고. 나를 위한 요리가 필요해.'
나는 그 자리에서 냉동 음식을 싹 치우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왔다. 마늘, 애호박, 표고버섯을 썰고 가스레인지 한 편에는 물을 올렸다. 혼자 놀던 아이는 이미 내 발치까지 와서 내 바지 밑단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 눈을 맞추고 앉아 이야기했다. '이제는 엄마 밥 먹을 시간이야. 조금만 기다려 줘. 엄마가 든든히 먹어야 너랑 더 재밌게 놀아줄 수 있어.' 아이는 눈을 몇 번 꿈뻑꿈뻑하더니 주변에 있던 냄비와 프라이팬을 꺼내 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진 것일까.
물론 요리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이에게 몇 번씩은 가서 리액션을 해주고, 주방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파스타 한 접시. 첫 입을 딱 먹자마자 나는 조금 전 냉동 음식을 먹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나에게 대접하겠다는 마음으로 요리한 파스타였다. 여느 때와 같이 정신없고 분주한 날이었지만, 식사를 하고 나서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고 행복해졌다. 내가 내 마음을 돌보기 시작한 때였다. 내 마음속에 귀를 기울이고 처음 행동으로 보여준 날이었다. 비록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 엄마도 잘 차려먹어야 힘이 나는구나.
가끔은 나를 위한 요리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는구나.
신기하게도 내 마음 상태가 어떤지에 따라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달라 보이고,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을 느꼈다.
어느 순간 받아들여졌다. 언제까지 이전과는 너무 다른 삶이라고 투정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현실 부정과 나에 대한 왜곡된 동정. 내가 뾰족해져 있는 그 순간에도 아이는 크고 있음을. 가장 빛나는 이 시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졌다.
나는 '엄마로서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아이 덕분에 제한된 나의 시간을 인정한 것이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엄마로서 사는 한 모습이 아닐까. 아이는 내게 삶의 우선순위를 알려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엄마로서 한 사람으로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한된 시간이기에 더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서서히 받아들이려 한다.
그때 카페에서 보았던 엄마의 시간을 조심스레 떠올려 본다. 아이가 잠든 시간, 귀하게 얻은 잠깐의 틈. 엄마만의 시간 속에서 엄마는 잠깐의 쉼을 선택했으리라.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를 시키고 아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10분 남짓의 재충전 시간이었지만 엄마는 단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힘이 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