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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Dec 16. 2020

딸아 우리 나중에 한번 더 만나자

글로, 책으로 말이야

몇 년 전이었을까, 책장에서 오래된 소설책 하나를 펼쳤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는데 한동안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거기에는 엄마의 필체가 있었다. 그 글씨를 본 그 순간 나는 그 시절의 엄마와 실제로 만난 것만 같았다.

 

1995. x. x. 장대비같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에 여러 장면이 스쳤다. 그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림잡아 계산해서 엄마는 당시 30대 초중반의 나이였다. 지금의 내 나이와 엇비슷한 나이였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조언의 말 같은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그 글씨에서 많은 힘을 받았다. 살아있는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조금 더 읽고 싶었다. 그래서 그 빗소리를 들으면서 좋았다는 건지, 외로웠다는 건지, 힘들지만 행복했다는 건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책의 페이지를 이리저리 들춰보았지만 다른 메모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도 엄마가 남긴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 엄마도 책 한 권 달랑 들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날들이 분명 있었겠지. 엄마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날의 짧은 기록이지만 말이다.






두 돌이 지난 딸은 요즘 책 읽기에 푹 빠졌다. 책 읽기라기보다는 '책에 있는 그림 보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이의 책장에는 내가 어렸을 적 보던 그림책들도 함께 끼워놓았다. 아이가 아직 아무 장난감도 제 손으로 가지고 놀지 못하던 때부터 나는 옛날 그림책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적 읽었던 짧은 그림책을 들고 와 아이 앞에 펼쳐 보인 것이다. 


아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제대로 된 뜻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도 아이는 내 눈을 응시하고, 내 목소리의 높낮이를 더듬거리며 나와 함께 호흡했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그림만 보여주었다가, 책 속의 캐릭터들을 짧게 소개하다가, 장면 하나를 소개하다가, 이야기 전체를 읽어주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줄이기도 하고 아이 귀에 속삭이듯 말하기도 했다. 책을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내렸다가, 특정 부분에서는 책을 날리고 잡는 시늉도 했다.


 아이는 지루해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얼마나 많이 읽어주었는지 나는 어느새 그림책을 통째로 다 외워버렸고, 책 없이도 그 그림책의 내용을 읊는 시늉만 하면 아이는 까르르 웃기 바빴다. 나는 '이만하면 구연동화대회에라도 한번 나가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책 읽기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아이가 뱃속에 있었을 때 태교동화 한번 내 목소리로 읽어주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분명히 내 뱃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지만,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존재에게 '내가 네 엄마란다......' 하며 책을 읽어주기란 너무 쑥스럽고도 와 닿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죄책감이 조금 들기도 했다. sns 피드를 조금만 내려 보아도 예비엄마 아빠들이 얼마나 태교동화를 성실히 읽어주는지에 대한 내용이 넘쳐났다. 나도 노력해야겠다 싶어서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너무 간지러워서 책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나는 태교 동화책을 펼쳐서 뱃속의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그저 조용하고 차분한 혼잣말로, 또 마음속으로 아이에게 꾸준히 말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의 죄책감을 만회하기라도 하려 하는 듯 나는 아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리고 최대한 아이가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내가 보던 책을 내 아이에게 읽히는 즐거움은 조금 특별하다. 내 손 때가 덕지덕지 묻은 책이 내 아이의 손에 쥐어진 순간, 어린 나의 시선이 수백 번도 담겼을 그 책에 내 아이의 시선이 덮이는 순간, 어린 나와 내 딸이 만나는 것만 같다.


엄마의 간단한 메모에 내 마음이 일렁거렸듯이, 언젠가부터 나도 내 아이에게 내 글을 넘겨주고 싶었다. 메모보다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말이다. 어쩌면 내가 남긴 글들이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의 내 나이가 된 아이에게 내가 쓴 글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글을 품에 안고 살아갈 수 있다면 조금은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이런 고민을 했었구나. 엄마는 이럴 때 이렇게 했었네. 이런 면은 조금 바보 같았네, 때로는 비웃기도 하면서 말이다. 꼭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대작이 아니더라도, 딸에게만큼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고, 어떤 일에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을 때, 그럴 때 내 글이 네게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과거의 내 글이 지금의 너에게 닿아 우리가 한번 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네가 내 글을 읽을 때마다 어쩌면 우리는 새롭게 만날 수 있지. 몇 번이고 말이다.


돈은 쓰면 없어지고, 물건은 세월의 흐름에 자유롭지 못하다. 시간이 지나 옛것의 아름다움이 묻어 나오기도 하지만 고장이 나거나 분실의 우려도 있다. 하지만 글은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따라 써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도 없어지기는커녕 조금도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그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세상에 나는 없어도 글은 남아서 아이 곁을 든든히 메꿔주기를. 훗날 딸의 책꽂이에 내 이름 세 글자가 박힌 책이 꽂혀 있는 즐거운 일을 상상해본다. 운이 아주 좋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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