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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Sep 29. 2020

미역이 선물해준 1시간

아이에게 놀잇감이란

아이의 기상과 동시에 분주한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내가 거실 블라인드를 올리며 오늘 날씨를 확인하는 동안 아이는 좋아하는 인형들이 제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가, 인형들을 끌어안았다가, 나를 따라서 창 밖의 하늘을 잠깐 쳐다보기도 한다. 우리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서 노래를 듣고 시리얼에 과일, 꾸덕꾸덕한 그릭요거트를 먹으며 하루를 연다. 아침을 충분히 먹고 나도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분명 하루를 시작했지만 몸은 아직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느낌이다. 어딘가 삐걱거리고, 행동이 굼뜨고, 아이의 행동에 내 반응은 반박자 늦다.


아이의 몸동작은 빠르고 가볍고 거침이 없다. 강아지 인형을 안았다가 바로 바닥에 던져버리고 고양이 인형을 찾는다. 손에 넣은 고양이 인형과 소파에 앉아 함께 책을 읽다가, 무심코 올려다본 서랍장 위의 기린 인형에 시선을 두고 곧장 그 인형을 가지러 간다.  아이는 기린 인형과 고양이 인형을 뽀뽀시키는가 하면, 기린 인형 위에 고양이 인형을 얹어 놓고 아침 태양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 일련의 과정은 1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아이의 동작과 행동반경을 주시하고 양질의 리액션을 해줄 '의무'가 있는 엄마로서의 나는, 때로는 지치기도 한다. 아니 자주 그렇다. 특히 몸과 정신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오전 시간이 그렇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걸 했는데, 고작 20분이 지났다고?'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의 시간 체계는 아무래도 다른 시간대와 다르게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체감하는 시간의 흐름과 실제로 시간이 지나간 거리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거실에 있는 시계가 고장난 것이 아닌지 핸드폰 속 시계와 몇 번을 대조해서 확인하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의 마법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1시간이 60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오전 시간 동안의 1시간은 90분으로 설계된 것은 아닐까?' 가끔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오전 시간이 정말 빨리 흘렀다. 여느 때와 다른 체계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평소처럼 나는 아이와 한참 놀다가, 전날 밤 국거리 고기를 냉장고에서 밤새 해동한 것이 생각났다. 아이가 먹을 미역국을 끓이려던 참이었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미역을 꺼내 불리고 요리할 준비를 했다. 혼자 책장을 넘기던 아이는 내 발치로 와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같이 놀자는 이야기다. 나는 평소처럼 "엄마 지금 맛있는 미역국 만들고 있어. 잠깐만 기다려줘." 했지만 아이는 아랑곳없었다.


"엄마엄마엄마엄마!"


아이는 계속해서 안아달라고 재촉했다. 이제 막 미역을 불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식탁에 놓아두었던 남은 미역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봐봐. 미역이 지금 엄청 뾰족하고 단단하지?

이걸 물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 같이 물에 담가볼까?"


엄마에게 매달리며 같이 놀자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아이는 이미 미역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나는 빠른 동작으로 미역을 꺼내 아이 앞에 놓아두었다. 한쪽 냄비에는 물을 담아서 아이가 컵으로 미역에 물을 뿌릴 수 있게 했다. 딱딱하고 뾰족했던 미역을 물에 불리면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과정이 아이에게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였으며 최고의 놀이였다. 


엄마 미역국 끓이세요 저는 미역이랑 놀게요 :-)


아이는 물에 흠뻑 불린 미역을 작은 컵에 수북이 쌓아보았다가 다시 큰 쟁반 위에 옮기는 행동을 반복했다. 미역을 한 움큼 집어서 한 줄기씩 분해해보기도 하고, 분해한 줄기를 공중에 살살 흔들어 보기도 했다. 두 손에 쥔 미역 줄기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손에 쥐고 있던 미역 줄기와 다른 손의 짧은 미역 줄기가 신기한 한동안 눈을 끔뻑였다. 미역 위에 물을 뿌려보기도 하고 바닥에 뿌려보기도 했다. 미역 한 움큼을 한가득 움켜잡은 다음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유심히 보기도 했고, 잡고 있던 미역을 트레이 속으로 다시 던져보기도 했다.


아이는 미역을 중심에 두고 자리를 옮겨 가며 다른 각도로 미역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온 몸으로 몰두했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엉덩이를 들고 물이 담겨 있던 빈 냄비를 나에게 살며시 건네주었다.


'엄마 나 이제 다 놀았어요'의 사인이었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아이는 한 시간을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뜰 줄을 몰랐다. 미역국 끓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급하게 내어 주었던 미역이 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놀잇감이 되었다. 아이가 노는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고는, 튄 물에 아이가 미끄러지지 않게 깨끗한 행주로 바닥을 닦아주는 것뿐이었다. 몇 발짝 떨어져서 아이가 미역을 가지고 어떻게 노는지 구경했을 뿐이다.  


아이는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거나 무슨 소리가 나도 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아이 옆에서 조용히 그 몰두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진지하게 오므린 그 앙증맞은 입술과 호기심만으로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나는 불현듯 행복감에 젖어 든다. 이토록 순수한 존재라니!


말없이 열중하고 있는 아이 옆에서 나도 마음속으로 조용한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뜬금없이 물밀 듯 밀려오는 감동에, 아이를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이가 스스로 충분히 몰두하고 난 뒤에는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나는 눈빛이 좋다. '엄마 놀았어요. 진짜 재밌었어요. 기다려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같은 눈빛이 좋다. 아이가 세상을 알아가는 오늘이, 가장 보통의 순간이 새삼스럽게 감사하다. 



"오늘은 오전 시간이 정말 빨리 갔어.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어."

아이를 낮잠에 재우고 나서,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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