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며 알게 된 제주살이의 빛과 그림자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꿈꾸는 제주살이, 그중에서도 한 달 살기. 만약 내가 그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육지로 돌아갈 시점이지만 다행히 우리 가족은 1년 살이로 이곳에 왔고 어느덧 한 달이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로망을 품고 제주에 온 건 아니었다. 육지의 빠른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고 아이들 중학교 가기 전 조금 더 깊고 특별한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제주에서 살아보니 어때?” 그래서 오늘은 막 한 달을 채운 지금 제주살이의 현실적인 장단점을 솔직하게 나눠보려 한다. 제주살이를 꿈꾸는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작은 이정표가 되었으면 한다.
자연 속의 일상에 스며들다
제주에 오면 자연을 보러 간다는 개념이 사라진다. 바다는 집 앞 골목 끝에서 마주하고 하늘은 매일 다르게 얼굴을 바꾼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조차 도시에선 느끼지 못했던 온도다. 관광지가 아니라 생활의 배경이 자연이 되면 사람의 감각도 달라진다. 굳이 어딜 가지 않아도 하루가 충분히 아름다워진다.
스마트폰보다 바다가 재밌는 아이들
나는 종종 아이들에게 묻는다 “제주에서 뭐가 제일 좋아?” 남매의 대답은 단순했다. “마당에서 노는 것, 하교 후 바다로 바로 갈 수 있다는 것, 무지개를 자주 보는 것,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이 좋아.” 놀이터 대신 모래밭, 유튜브 대신 해안도로 산책. 자연은 아이들의 주의를 빼앗는 게 아니라 차분히 끌어당긴다. 디지털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로선 고마운 일이다.
몸으로 배우고, 감각으로 익히는 제주살이
제주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체험이 가능한 땅이다. 헬스장 대신 가까운 오름을 오른다. 굳이 트레이닝 계획이 없어도 걷는 길 자체가 운동이고 명상이 된다. 아이들도 다르다. 예술 학원 대신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색감과 감각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그건 책이나 강의로는 채울 수 없는 몸으로 체득하는 감성 교육이다.
학교 방과 후 수업엔 ‘승마’가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고 읍 단위 지역이라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체험형 지원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배움이 일상이고 일상이 배움이 되는 환경. 이곳에선 그게 가능하다.
당근마켓이 생활을 가볍게 해 준다
제주는 단기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절 따라 들어오고 또 계절이 바뀌면 조용히 나가는 이들이 많다.
덕분에 당근마켓은 활발하게 움직인다. 풀옵션 임대가 대부분이라 큰 살림은 필요 없고 그 덕에 나오는 좋은 물건들도 많다. 필요한 걸 찾을 땐 쿠팡보다 당근이 먼저 떠오른다. 운이 좋으면 원목 책상을 만 원에 살 수도 있고 가끔은 나눔으로 필요한 걸 채울 수도 있다. 이사 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엔 원하는 걸 구매하기보다 얻는 일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살림은 덜 갖추되 더 만족스러워진다.
속도보다 깊이에 집중하게 되는 시간
도시의 하루는 늘 빠르게 흘러간다. 다음 일정, 다음 알림, 다음 약속. 시간은 쫓기듯 지나가고 하루가 너무 짧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다르다. 느릿하지만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아이들은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고 어른은 단출한 반찬에도 마음을 담아 식탁 위 대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하루를 채우는 건 속도가 아니라 깊이다. 빠름 대신 쉼이 있는 시간, 반복 대신 발견이 있는 시간. 그렇게 비워둔 자리에야 진짜 여유가 스며든다.
배움이 생활에 스며든다
제주에서는 굳이 학원을 가지 않아도 배움이 아이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마당에서 모종을 심으며 계절을 배우고 꽃시장에서 식물의 이름을 익히고 조개껍데기를 줍다가 파도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에 대해 묻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스스로 창밖을 보며 “이러다 무지개 뜨겠다”는 예언 같은 말을 한다. 책상 앞에서가 아니라 길 위에서, 손끝으로, 몸으로 배우는 일상. 그게 이곳에서의 공부다. 그렇게 배움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매일같이 우리 곁에 스며들고 있었다.
도시에서의 일상, 숨 쉴 틈 없던 아이들
제주에 오기 전 아이들의 하루는 늘 바쁘게 흘러갔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 집에 오면 늦은 저녁을 먹고 그 사이 숙제를 마치면 잠들 시간. 놀 시간은커녕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 가끔 그런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엄마인 나에게도 참 안쓰럽고 답답한 일이었다. 뭘 그렇게 서둘러야 했을까. 그 나이에 그렇게 숨 가쁘게 살아야 했을까. 돌아보면 그게 마음에 오래 남는다. 하지만 제주에선 달랐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기고 놀잇감이 없어도 자연이 스스로 놀이가 되어주었다. 흙을 밟고 바람을 느끼고 고요를 견디는 사이에 아이들의 짜증은 줄고 불안하던 시선은 한결 편안해졌다. 차분해진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지금 자기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생활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육지에서의 삶은 늘 해야 할 일로 가득 찼지만 제주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해. 쇼핑을 안 하게 되고 사람 눈치 덜 보게 되는 삶, 그게 진짜 여유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제주는 풀옵션 집이 많고 기후 특성상 옷도 단순해지다 보니 짐도 살림도 소비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그러다 보니 정리보다 덜 가지는 법을 배우게 되고 필요한 물건을 오래 소유하기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넘기는 사는 것보다 잠깐 쓰는 것이 익숙해진다.
나만의 리듬을 되찾는 일상
도시에서는 알람이 울려서 하루를 시작했다면 제주에서는 햇살이 비쳐서,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연다. 스케줄표보다 중요한 건 밥 냄새나는 아침, 따뜻한 햇살 아래 빨래 너는 여유로운 시간, 매일 마당에서 보는 선셋. 하루가 누구의 시간표가 아닌 우리 가족만의 리듬으로 흘러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이 많이 달라진다.
변덕스러운 날씨, 계획은 무의미
제주에서의 날씨는 예보보다 운에 가깝다. 맑다더니 갑자기 바람과 함께 비가 몰아치고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로 세차게 쏟아진다. 덕분에 우리는 계획 없음을 계획으로 삼았다. 비 오는 날엔 실내 체험을 날씨가 허락하는 순간엔 무조건 밖으로 나간다. 살짝 번거롭지만 그것도 제주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생활의 불편함, 느린 시스템
마트 하나, 약국 하나도 차를 타고 20분 거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은 걸어서 다니기엔 꽤 불편한 지형이라 편의점조차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로켓배송은 내일 도착 대신 늘 이틀 뒤에야 도착하고 부피가 큰 가구는 배송비가 10만 원까지 붙는다. 배달앱은 설치만 되어 있을 뿐 배달 불가 지역이라는 알림만 반복된다. 처음엔 이 모든 것이 불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없는 걸 찾던 습관 대신 있는 것으로 충분히 해보려는 태도가 생겼다. 예전엔 귀찮을 때마다 배달앱을 켰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매일 집에서 밥을 짓는다. 아이들에겐 덜 미안해지고 아이들 입맛도 조금씩 바뀌었다. 아침부터 밥을 찾고 식사량도 눈에 띄게 늘었다. 마트 가는 걸 미뤘더니 지출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결국 이 모든 불편함은 우리 가족의 생활을 더 단단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물가의 현실, 소박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관광지답게 외식은 늘 비쌌다. 간단한 브런치 하나에 커피 한 잔이면 만원 두 장이 훌쩍 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집밥을 택했고 그 선택은 단순한 절약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아이들도 커서 물가를 이해하는지 이 돈으로 차라리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줘라고 하면 그 맛에 나는 또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게 된다. “사 먹는 맛보다, 해 먹는 정성.” 제주살이 덕분에 배운 귀한 문장이다.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곳에서 나는 아직 누구의 지인이 아니다. 마음에서 마주치는 얼굴은 있어도 굳이 애써 인사를 건네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구에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그건 낯설지만 동시에 편안하다. 관계에서 조금 물러나 있으니 마음의 결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불필요한 말은 줄고 생각은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문다. 혼자라는 느낌보다 나만의 속도를 허락받는 느낌이 더 크다. 이 섬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시 나로 살아보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 한 달을 살고 나서
제주살이의 장점만 있진 않았다. 하지만 단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여기서의 하루하루는 무엇이 좋았는지보다 무엇을 느꼈는지가 더 오래 남는다. 제주에 와서 가장 크게 변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아침을 깨우는 건 알람 대신 창밖 자연의 소리였고 하루를 재촉하는 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알림이 아니라 밥 짓는 냄새에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도시에서는 늘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보호자로 살아왔다. 한 걸음만 늦어도 따라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나는 나를 놓친 채 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조금 느려도 괜찮았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흙냄새 나는 바람에 마음을 기대며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보는 일.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한 시간. 그 시간이 쌓여 우리는 조금씩 제주라는 섬에 사는 사람이 아닌 스며드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다음 9화에서는 실제로 경험한 제주살이 준비 과정을 풀어보려 한다. 단기 임대, 연세집 구하기, 초등학교 전학 정보와 학군 이야기까지 제주살이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