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진열창에 붙여진 30% 할인 광고가 가던 걸음을 돌려놓았다. 가게에 들어서자 얇고 쭉쭉 뻗은 통바지가 시원한 바다처럼 두 발을 끌어당긴다. 빼곡히 걸린 바지 하나를 슬며시 낚아챈다.
바닷물에 젖어도 툭툭 털면 금방 말라버릴 얇은 원단이다. 차르르 떨어지는 긴 바지를 몸에 댄다. 발목은 고사하고 뒤꿈치를 내려가 땅에 끌리기 직전이다. 신발이 3센티라도 굽이 있으면 좋으련만. 죄 없는 단화를 탓한다. 그 찰나 가게주인이 뾰족한 슬리퍼 한 켤레를 갖고 쪼르르 달려온다.
탈의실에 들어가 제대로 입어본다. 5센티 넘는 슬리퍼 덕분에 땅에 끌리는 것은 면했다. 다만 통이 넓어서 키가 더 작아 보이고 바람결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원단도 품 넓은 윗옷 때문에 무겁다. 잘 어울린다는 주인의 부추김이 아랑곳없는 순간이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가게 안으로 두 발을 넣을 때만 해도 거울에 도도하고 맵시 있는 내가 들어 있었다. 아래로 툭 떨어지는 찰랑찰랑한 느낌이 다리를 길어 보이게, 발등을 살짝 덮는 긴 바짓단이 늘씬해 보이게 할 것이라 믿었다. 상상인데 뭔들 예쁘지 않을까.
나처럼 키 작은 사람은 잘못 입으면 가로로 퍼져 보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하이힐이나 통굽으로 어느 정도 메워질 것으로 예상했다.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은 나를 멋쟁이로 만들고 있었다.
현실은 다리에 살짝 붙는 일자바지다. 그 바지를 입는 이유는 상의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헐렁한 티셔츠나 품 넓은 블라우스를 걸치면 통통한 상체를 감추기 안성맞춤이다.
일자바지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무릎에서 내려올수록 서서히 좁혀지는 일자로 뻗으면서도 다리 굴곡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낙낙함이 있다. 허벅지가 굵어도, 종아리가 울퉁불퉁해도 그 정도 여유면 충분히 감싼다.
단점이 있다면 일자로 뻗어서 뻣뻣하다는 것이다. 때론 융통성 없는 나처럼 고집스럽다. 방향을 바꿔보라고 일러줘도 같은 자리만 맴돈다. 되풀이된 일상에 스스로 갇혀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굳어버린 익숙함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일자바지를 입어도 멋있는 사람은 다른 바지도 근사하게 연출할 줄 안다. 뻣뻣한 일자바지 하나만 고집하진 않는다. 일자바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싱그러운 여름처럼 유연한 통바지가 있다. 그중 와이드롱팬츠가 주는 분위기는 왠지 세련되고 도도하다.
통바지 중 하나인 와이드롱팬츠는 길이가 짧고 넓은 통바지에 비해 부해 보이거나 벙벙한 느낌이 없다. 길이도 발등을 살짝 덮고 통도 적당해 재킷이나 셔츠와 함께 입으면 격식을 차린 듯 단정해 보인다. 거기에 베이지나 검정 같은 단색 힐을 신으면 도도한 매력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늘씬하고 자신만만한 통바지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주눅든다. 헐렁한 상의에 무릎 낡은 일자바지를 입고 있는 내 앞에 등장한 멋스러운 통바지 그녀, 좀처럼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은 도도한 눈빛에 몇 마디 말을 건네기도 불편하다.
그에 비해 오래 입은 일자바지는 묵은 이웃처럼 푸근하다. 값비싼 백화점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집 근처 마트로 돌아와 장을 보는 같은 편안함이 있다. 그러면서도 아는 사람을 보면 후줄근한 차림 때문에 피하기도 하고, 새로운 변신을 도모하자고 하루 이틀 마음을 다지기도 한다.
작년 여름에 산, 아랫단이 치마처럼 넓은 청색 통바지가 있다. 변화를 주라는 말에 홀린 듯 사놓곤 한 번도 입지 않은 채 옷장에 모셔두고 있다. 패션도 서서히 바꿔야 자연스러운데 서른 해 넘도록 들러붙는 일자바지 스타일만 입다가 4차선 도로 같은 통바지라니. 바꿔보자는 마음에 사놓고선 급격한 변화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올해 봄, 여기저기 결혼 소식으로 대구를 다녀올 일이 서너 번 있었다. 옷은 매년 사는데 옷장을 열어보면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 그렇다고 낡은 일자바지를 입고 갈 수도 없고. 서둘러 옷 가게를 가서 허벅지 라인까지 살짝 붙다가 무릎 선부터 삼각골로 퍼지는 베이지색 부츠컷(세미 나팔 바지형) 바지를 샀다. 서서히 변화를 시도하라는 딸아이 조언 덕분이다.
부츠컷 바지에 용기가 생겼을까. 곧이어 바닷물처럼 시원한, 차르르 떨어지는 와이드롱팬츠를 사고 말았다. 계속되는 주인의 부추김에 마음이 살랑살랑 움직인 것이다. 윗옷을 잘 갖춰 입으면 된다는 말에 덤으로 상의까지 함께 얹어 집으로 데리고 왔다. 희한한 것은 바지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날개 달린 부적이라도 된 듯 자신감이 살아난다. 옷이 감정을 좌우하는 게 어이없음을 알면서 옷 하나에 기분이 좌우되는 것을 보며 마음을 띄워 줄 무언가가 필요했구나 싶다.
일자바지든 통바지든 같은 옷일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후줄근한 일상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는 도도한 패션이 된다. 일상과 패션의 경계를 허무는 사람도 많건만 굳어버린 시간에 갇혀 작은 것 하나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쉬운 일이 나에겐 왜 그리 어려운지.
익숙한 일자바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바지도 그간 뻣뻣한 나를 감춰 주느라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요리조리 방향도 바꾸고, 거추장스러워 달지 않는 목걸이 귀걸이도 하고, 얇은 원단에 찰랑찰랑 휘감겨도 보며 어떨까. 그러면 바람에 나부끼는 향기가 다르게 느껴질지도.
옷장을 열어 작년에 산 4차선 통바지를 꺼내 몸에 대어본다. 이 정도쯤이야 가볍게 입지 않을까. 허세 띤 웃음 하나가 짙푸른 여름을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