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 단편, 한강, 돈, 미래

by Renaissance

브런치에 글이 뜸해지면 뭔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창작욕은 있는데 영화 시나리오는 쓰기 싫어서였다. 시나리오를 아무리 써도 팔리는게 없자 그 힘을 브런치 글을 쓰면서 달랬다. 주기적으로 산책을 나가던 강아지가 산책을 못하게 되면 소파라도 물어 뜯으며 힘을 써야하지 않겠나. 그러다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나를 뜯어말리는 동료들이 단편을 찍어보라고 했다. 그래, 찍지 뭐. 모아둔 돈을 다 탕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속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모으던 돈이었다. 어차피 그만둘거면 돈을 모을 이유도 없다. 내가 집을 살만큼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고, 1년 버틸 정도의 돈을 모아놓은 거니 그걸 털어넣어서 단편을 찍으면 이제 진짜로 돈이 없으니 알바라도 하게되지 않을까 싶었다. 장편 시나리오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다른 일 하면서 부업으로 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태스크가 아니다. 다른 일을 하면 시나리오를 못쓸 것이고, 자연히 멀어질 것이다.


그러던 중에 올해 낸 무수한 공모전 중 한 곳에서 예심을 통과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다른 공모전에서는 다 떨어졌는데 이게 되네? 싶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이유가 있어서 떨어졌을테니 최종까지 갈 확률은 매우 적다. 그래도 예심에 통과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래, 재미없진 않은 거잖아 그지? 내가 나름 커리어가 있는 사람인데 똥을 썼겠냐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영화계가 똥망이라 나 정도 커리어로는 먹고 살 수가 없는데.


인맥으로 드라마 제작사와 연결이 됐다. 세 가지 아이템 정도를 주면서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아니 그 중에 아무 아이템이나 저랑 계약을 하시지 뭘 생각을 해보라는 겁니까. 물론 면전에 대고 그렇게 얘기하진 못했다. 아이디어랑 기획안만 뽑아먹고 계약을 하지 않는 제작사를 하도 많이 만나다 보니 그냥 울컥할 뿐이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못 뱉는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내가 상업 각색 두 편을 하고 S급 배우 캐스팅을 돌리던 시절 실제 이런 태도로 미팅을 하고 다녔다. 계약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뭘 제가 더 검증해야 합니까. 맡겨 주시면 잘 써드릴테니 계약 생각 있으면 연락 하시라. 내가 그렇게 말 하고 다녔다가 일이 다 끊겼다. 캐스팅은 되지 않았고, 난 더이상 일이 없다. 무조건 저자세로 굴어야 한다. 관두고 취직한다고 하는 놈이 무슨 드라마 각색이냐 하겠지만, 이것도 취직이다. 지금 내 각본료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갈 확률이 더 낮다.


꼭 그만두려고 하면 이런저런 일들이 생긴다. 삶은 참 우습다. 일하게 해주세요 난리칠 때에는 그렇게 일이 없더니. 한강 작가의 책을 한권 두권 보고 있는데 소년이 온다, 검은 사슴, 이번엔 희랍어 시간이다. 소년이 온다를 보면서 역시 노벨상 작가는 다르구만 했다가 검은 사슴을 읽고 데뷔작이라 그런건가 했다가 희랍어 시간을 읽으며 역시 노벨상 이러고 있다. 문장이 너무 아름답다. 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인데, 죽기 전에 이런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싶다. 나에게 그런 가능성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감탄의 표현이다. 검은 사슴과 희랍어 시간 사이에 10여년의 시간이 있다. 그 10년동안 한강 작가는 말을 수집하고, 표현을 수집하고, 고치고 또 고쳐 썼을 것이다. 나도 마지막으로 단편을 찍은게 10년 전이다. 나는 10년동안 얼마나 성장했을까. 결과물이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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