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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지구를 걷다
by 한강 Jul 05. 2018

신비로운 폐허 속으로, 벵밀리아에 가다.


어릴 적 내 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의 만화 영화들을 보여주시곤 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 등등.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영화를 다시 보곤 한다. 지금 와서 봐도 여전히 재밌고 느끼는 것도 많으며 무엇보다도 추억을 머금고 있기에 자주 찾게 된다. 어느 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캄보디아에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된 곳이 있다고 들었다. 바로 벵밀리아(Beng Mealea)라는 곳이다. 왠지 여기는 꼭 가야만할 것 같았다. 



벵밀리아에 처음 들어서면 보이는 나가상이다. 나가는 캄보디아에서 신성시되는 뱀(혹은 용)인데 캄보디아 건국신화를 살펴보면 '나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인도의 왕자 카운디나는 신의 계시를 받고 동쪽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나가왕의 딸 소마 공주가 이끄는 군대와 마주치게 된다. 카운디나 왕자는 무력으로 공주의 군대를 제압한다. 이 과정에서 다친 공주를 위해 카운디나 왕자는 자신의 옷을 벗어 그녀의 상처를 가려주었다. 이를 인연삼아 소마 공주와 카운디나 왕자는 혼인을 했다. 공주의 아버지 나가왕은 주변의 물을 모두 마셔 숨겨져있던 땅을 끌어올려 공주에게 선물로 준다. 이 땅이 바로 캄보디아이다.


왠지 우리나라 호랑이와 곰이 생각나는 건국신화다. 나가로 대표되는 토착민들과 인도 왕자로 대표되는 외부 세력(힌두교를 믿는 인도)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나라가 캄보디아인 것이다.



벵밀리아에 들어선다. 부서진 돌들이 어지러히 흩어져 나뒹굴었다. 군데군데 돌 틈 사이로 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내여 가지를 퍼트리고 있었다. 자연에 잠식당한 폐허 속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마치 내가 모험가라도 된 양 두근거림을 안고서 벵밀리아를 거닐었다.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들 사이로 그나마 온전한 유적의 모습들이 보이기도 했다.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돌들을 보며 옛 왕조의 영광을 떠올려 본다. 크메르어로 벵(Beng)은 호수라는 뜻이고 밀리아(Mealea)는 연꽃을 뜻한다. 사원 주위로 거대한 해자가 있는데 사원이 물 위에 떠있는 연꽃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인터넷에서였던가? 벵밀리아 해자 위로 연꽃이 가득한 사진을 보았었다. 비록 내가 갔을 때는 건기라 그런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벵밀리아는 수리야 바르만 2세가 만들었다고는 하나 정확하진 않다. 발견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천공의 성 라퓨타' 영화에 나오던 폐허가 된 옛 도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록 잎파리들로 물든 나무들과 곳곳에 낀 푸릇한 이끼들. 여기저기 부스러져 있는 돌덩이들과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얼룩진 햇살.



가이드를 따라 여기저기 돌덩이들을 밟으며 깊숙한 곳으로 들어랐다. 바보같이 나는 긴 치마를 입고 와서 많이 불편했다. 모기녀석에게 물릴까봐 일부러 긴 치마를 입고 갔건만! 돌 사이사이가 멀기도 하고 높이 차이도 꽤 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돌덩이에 두 손을 짚고서 다른 돌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편한 바지와 운동화가 필수인 곳이다.



벵밀리아에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무척 많았다. 보통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어딜가나 가득인데 이곳은 특이했다. 내가 갔던 날만 그랬던 것일까?



가이드는 일부러 관광객들이 적은 곳 위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벵밀리아는 앙코르 와트에 버금가는 규모의 사원이지만 그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씨엠립에서 멀기도 하거니와 사원에 대한 고증도 덜 되었으니 그런 것 같다. 재밌는 사실 하나는 캄보디아에서 폐허가 된 이곳을 일부러 복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흐트러진 폐허같은 모습에 끌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는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가이드는 이제 자유롭게 사진 찍을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10분의 자유시간. 다른 투어객들은 사진을 찍으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우리는 10분 뿐이니 바쁘게 움직이지 말고 그냥 돌무더기 주위에 있기로 했다. 나란히 앉아서 음악을 듣고 같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냥 이 곳에 푹 잠겨서 신비로운 기분을 좀 더 만끽해보려 했다.



10분의 시간은 긴 듯 짧은 듯 지나가고 모두가 모였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벵밀리아를 떠났다. 내 인생 속에서 고작 몇시간 얼마 차지하지도 않는 순간이었지만 왜 이렇게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일까? 어릴적 추억과 뒤섞여서 그런 것일까? 의미를 부여할수록 여행의 기억들은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더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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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뚜벅뚜벅 지구를 걷다
소속 직업회사원
글쓰는게 취미인 평범한 직장인의 끄적임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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