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산다. 본성이 아무리 게으르다고 하더라도 근면성실한 직장인의 얼굴일 수도 있고, 누구보다 양보 잘하고 착한 딸일지라도 친구들 사이에서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스포츠야 말로 게임에 빠지는 순간만큼은 정말로 무아지경에 빠지며 내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나이와 성별마저 잊고 승부에 나를 던지게 된다. 꾸미지 않은 내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레슨과는 별개로 본격적으로 테니스 게임을 찾아서 일일 게스트로 떠돌게 되면서 다양한 파트너를 만날 수 있었다. 우선 네이버 밴드에 ‘테니스 친구찾기’에 가입했다. 1년차에서 2년차의 혼복이나 여복 게임을 찾아 헤맸다. 테니스에 미쳐 있는 사람이라면야 주 7회도 마다하지 않을 테지만 나의 체력과 시간적 여유, 그리고 손목에 너무 많은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주 2회에 만족해야 했다. 심지어 충격파 치료 때문에 찾았던 두 군데의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테니스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손목이란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즐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무작정 게임 횟수를 늘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 네트를 넘기지도 못했던 볼의 파워가 세지고 어느덧 테린이들 클럽을 기웃 거리며 게임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했다. 오랜만에 나를 테니스의 세계로 이끌어준 동생 ‘예지’를 만났다.
- 언니, 테니스 게임하다 보면 성격 나오는 거 알죠?
- 큭큭,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 듣겠다.
실로 그러했다. 회사 탓, 부모 탓, 사회 탓, 남 탓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복식 게임에서도 포인트를 잃게 되면 파트너를 탓 하는 경우가 많았다.
- 방금 건 슬라이스로 받아치면 안되는데
- 휴~방금 볼은 공이 짧았잖아요.
나 역시 답답함과 한심함이 가득섞인 목소리를 파트너에게 들어봤었다. 내가 너무 못쳐서 그런거 아니냐고? 아니다, 바로 다음 날, 다른 게임에서 나와 파트너가 된 사람은 똑같은 나를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 괜찮아요, 괜찮아요, 걱정 말고 자신감 있게 치세요.
- 나이스 트라이! 아 아쉽다! 방향은 맞았는데! 나이스 나이스!
- 아, 죄송해요. 제가 마크 했었어야 하는데 제가 놓쳐서 그래요.
이런 사람들은 아마 평생 남탓보다 자기 탓을 많이 하는 성향이리라. 남에게는 관대, 자기에게는 엄격한 사람들. 그 밖에도 상대보다 실력이 높다고 판단하면 테니스 전문가도 아니면서 스윙폼이나 포지션까지 가르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받아 들이는 입장에서는 ‘웬 꼰대짓이야’ 혹은 ‘자기나 잘하지 왜 아는 척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는 꼰대짓 인거 아는 꼰대가 어디 있으랴. 가르치기 좋아하고, 아는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선의’를 앞세워 계속 남에게 훈수두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회생활 할 때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원초적 본성이 이렇게 테니스 게임때는 어김없이 드러나는 걸 깨닫게 된 후, 스포츠를 통해 나를 또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다. 굳이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만 비난을 받을 경우에는 움츠러 들지 않는다. 프리랜서로 돈을 벌다 보면 멀쩡히 계약서를 쓰고 진행하다가도 일이 끝난 후에 트집을 잡아서 돈을 현저히 적게 주거나 안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소송을 걸어서라도 끝까지 계약금을 받아냈다.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할 말은 하자’ 라는 모토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나의 가치관 역시 테니스 경기를 하다보면 드러났다.
내가 에러를 낼 경우에는 파트너에게 거듭 사과했다. 속상해서 거트를 손으로 뜯는 버릇도 생겼다. 그러나 파트너가 너무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경우에는 나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올린 로브를 두 번 연속 받아치지 못해서 실점하자 나에게 대놓고 신경질을 부리는 파트너도 있었다.
- 로브 못 치세요? 그냥 네트만 넘긴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 우리 모두 볼 컨트롤을 잘 못하니까 테린이 소리 듣는거죠, 뭐.
분명히 본인도 엄청 잘 치는 거 아니면서, 나랑 비슷하게 테린이 클럽에서 게임 하는 수준에 불과 하면서 대놓고 남에게 무안을 주는 사람을 상대할 때면 나도 꼭 이렇게 받아쳐야 직성이 풀렸다.
그냥 흘려들을 건 흘려듣고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큰 사람 이었으면 좋겠다만 일희일비 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편협한 자세가 테니스를 치면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과 테니스 한 게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쩌면 가장 적나라하게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는 방법 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