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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뢰렉신 Jun 05. 2017

마음의 틈

그로인해 한 사람을 잊어야 했던 이야기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생각 없이 자주 쓰는 단어인데


왜 이 단어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지?



라고 갑자기 낯설 때가 있다.


오늘도 그랬다.

내가 자주 쓰는 '마음'이란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


마음 하면 왠지 머리가 아닌 심장 쪽 즉, 가슴의 상태 신호를 말하는 느낌이다. 뇌에서 그려지는 것은 생각. 그리고 심장에서 스며져 나오는 뭔가는 '마음'이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 가슴 쪽을 부여잡는 것도 같은 맥락 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마음에 든다'라는 표현을 자주 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니면 어떠한 매체나 개체이든. 마음에 든다라는 것은 감정적 애착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음속 울림의 파장이 신호 형태로 의식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머리로 보내어져 그것이 좋다고 머리가 생각해 내는 것이리라.




마음의 틈.


마음이란 두리뭉실한 덩어리에 틈이 생길 때가 있다.

그 틈이라는 균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상 속에서 시나브로 겪어내는 작은 상처들과 작은 부정적 결과들이 틈을 만들어내고 조용한 벌어짐을 초래한다.


그 틈을 통해 영혼  자아에 대한 존중감이 계속 새어나가는 걸 인식 못하고 있다가 결국 빠질 만큼 빠진 마음의 부피에 따라 텅 빈 허전함을 느껴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것이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을 통한 결과라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마음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향한 거울과 같다.

내 모습을 비추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모습을 비추어 내게 보여준다.


다만 내 마음에 비추어진 상대의 '모습'은 내가 그려낸 모습으로만 비추어진다라는 것이다.

지극히 내 주관적 판단만으로 만들어진 상대의 '의도를 품은 모습'이 진실과 다르게 투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관계의 치명적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 마음의 틈이 마음 거울 속 '나'와 '상대'모습을 왜곡되고 일그러트리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현실의 실재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둔하고 아집을 부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자. 이제부터 내 마음의 틈으로 인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 한다.


예전에 진심으로 나에게 마음을 열어 바닥까지 보여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착하고 순수했던 마음이 나에게 전해져 왔기 때문에 내 마음속엔 그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 사람은 온종일 쫑알쫑알 내 귀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들려줬다.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 치, 모든 걸 다 보여주고 드러내는 그 투명성에 '뭐야, 이 사람? 나에게 완전 유리 인간인데? 부끄러움이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칠푼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앞뒤 따지지 않는 그 사람의 그런 솔직한 면모들이 매력적으로 생각되고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나를 믿고 무슨 말이든 해주는 그 순박한 신뢰감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무엇이 그렇게 나를 비틀어지게 만들었는지, 내 마음이 비추어 내었던 그 사람의 모습은 나의 달콤함만 취하면 곧 떠날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에게 잘해주던 모습에 순수함과 진정성을 깨달기보다는, 의도가 뭘까라는 생각과 궁리만 했다.


왜 나같이 피드백이 부족한 사람에게 저렇게 잘해주고 좋아해 줄까? 나보다 더 수준이 높은 사람인데 뭐가 부족해서 저럴까? 나보다는 훨씬 더 근사하고 조건 좋은 사람과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말이지.


나도 어디 가서 자존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라 자부했지만 도저히 이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장점이 부족했다. 같이 있으면 내 부족함이 너무 드러나 불편감이 점점 늘어갔다. 결국 나는 내 자존감을 더 이상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 퉁명스럽고 괴팍하게 그 사람의 호의와 관심을 야멸차게 밀어내었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은 며칠 동안은 기가 죽었는지 시무룩해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오뚝이같이 '헤헤히히' 천진하게 웃으며 툭툭 내게 다가와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따라다녔다.


나와 다시 마주 앉았을 때는 턱을 괴고 하염없이 쳐다보며 내 어깨의 먼지를 털어주고 내 밥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는 그런 그윽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 사람을 옆에 두고 내 마음의 틈이 생기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뭔지 모를 열등감, 피해의식, 거기에 자격지심까지 더해지면서 상대의 순수한 의도와 마음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맞다고 판단해버리는 내 머리 속 복잡함이 내 마음의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9를 잘해주고 1을 못해주면, 바로 나는 거봐하며 9를 제쳐두고 1을 가지고 부정적 결론짓고 그 사람을 밀어내는 나 자신을 부추겨 스스로에게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것을 통해 회복되는 내 자존감에 한껏 으쓱해짐까지 느낄 정도였다.


점점 내게 지쳐가고 질려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나는 왜 그렇게 더 잔인하게 대했을까?


더 이상 우리 연락하거나 만나지 말자고 차갑게 통보하던 그날. 가로수길 어느 카페에서 아무런 대꾸조차 못한 채 펑펑 울기만 하던 그 사람을 홀로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혼자 씩씩거리며 변태 쪼다 같은 다짐을 했다.


내가 더 대단해져서 나를 붙잡지 못한 당신을 더 후회하게 만들 거야


나의 밀어냄에 지쳐해 가는, 질려해 가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던 것 같다. 밀어낸다는 것은 정을 떼고 관계를 끝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닌가? 행동과 마음이 불일치하는 상황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비겁하게 모든 걸 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순수했던 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나 자신이 한동안 너무 혐오스러웠다.


'그렇지만 잘한거야. 지금은 괴롭겠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나를 벗어나는게 좋아. 그리고 나에게도 잘된거고'


나 자신을 제일로 사랑하는 나는, 내 행동에 합리화를 통해 자기혐오의 결계를 그리 어렵지 않게 풀어내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사람은 3개월마다 스스럼없이 다시 연락을 해왔다. 나도 마음이 평정해진 상태라 또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만나자 하면 다음에 또는 바쁜 게 끝나면 내가 연락할게 하면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오만함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사람은 결코 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왜 그런 오만한 믿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 사람은 내가 건 마법에 걸려있어서 다른 사람은 절대 못 만날 것이다라는 주술적 맹신까지 들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20대 초반을 지나 30대 초반이 되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연락을 해오고 나를 그리워했다. 간혹 연애 안 하냐고 물어보면, 당신 같은 사람을 또 못 만났기 때문에 연애를 못하고 있다 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보내진 메시지의 프로필 사진에 순백색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메시지를 읽기 전에 바로 직감했다.


저.. 결혼해요.
제가 결혼한다는 걸 당신에게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순간, 뭔가 멍해짐을 느꼈다. 늘 우리 집 마당 앞에 있던 오래된 나무 한그루가 뿌리째 뽑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잊고 있을 때도 있지만 내가 보고 싶을 때 찾아가 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나무 한그루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닿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멀리서만 지켜보던 마음이 있었다. 그 배려의 마음이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고, 그를 기반으로 더 열심히 준비해 그 사람의 옆에 있어도 흠결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고 오랜 시간 살았던 기억이 있다. 내게 주었던 그 애틋한 마음에 대한 보답은 내가 그 사람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여건이 되면 두배 세배 충분히 해주겠어라는 심정으로 살았었다.


가난한 나 그리고, 부자인 그 사람.
볼품없이 생긴 나 그리고, 매력적으로 생긴 그 사람.
가방끈 짧은 나 그리고, 가방 끈이 긴 그 사람.
늘 퉁명스러운 나 그리고, 늘 상냥하던 그 사람.


모든 면에서 부족한 나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 사람을 오랜 기간동안 의심만 했다. 그 마음이 너무 부끄러워 한 번도 나를 왜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결혼식에는 못 갈 것 같다하니 얼굴이나 한번 보자 하여 마지막으로 만났었던 그 가로수길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동안 못 들었던 그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었다.



"당신을 언제나 존경했어요. 제 삶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이었고 항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삶의 열정이 대단해 언제나 제게 큰 자극을 주었어요.


당신 덕분에 항상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어요. 당신 옆에 있으려면 저는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저를 밀어낼 때마다 다짐했죠.


비록 당신의 마음을 얻는 건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그동안 제가 저를 가꾼 모든 것들은 훌륭한 자산으로 남았다 생각해요.


그래서 여전히 당신에게 감사하고 고마워요. 저의 20대 인생은 당신 빼고는 없을 것 같아요. 온통 당신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한 행동들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그간의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풀이해내 버렸다. 역시 나보다 큰 사람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하다 느꼈다는 것이다. 표현의 방법은 달랐지만 각자 위축된 자존감으로 오랜 시간을 지루하게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은 의심을 했고, 한 명은 자책을 했다. 그런 마음의 어긋남이 이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간의 서로가 생각했던 회고를 들어본 그 만남 이후, 더 이상 인연은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은 누구를 좋아하는 힘이 대단한 사람이다. 온통 한 사람에 모든 걸 충실하는 사람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락이나 만남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그 사람이 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귀찮다고 퉁명스럽게 그 사람을 밀어낼 때,

눈물을 글썽이며 내 눈을 보며 했던 말,


당신이 인연의 끈을 놓더라도, 저는 절대 그 끈을 놓지 않을 거예요!

.

.

.

.

이제,

그 끈을 놓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래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신의 마음을 안받은게 아니고

밀어낸게 아니고, 어떻게 받아야할지 몰랐던거 같아요.

제 마음의 틈이 당신의 헌신적 애정을 왜곡해 보여줬어요.

그땐 제가 너무 상처많은 사람이어서 그랬나봐요.

그래서 항상 미안했어요.


저와 조용한 휴양지 바닷가에 발 담그고 즐겁게

대화하는 꿈을 꿨다고 너무 행복했다고, 아침부터 전화한 그 목소리 아직 생생하네요. 꼭 현실에서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들뜬 목소리로 약속해요, 꼭 약속해요 라고  몇 번이나 확인받으려던 그 사랑스러움은 이젠 잊어야겠어요.


누가 또 그렇게 저를 좋아해줄까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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