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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중년이 되면 산에 가는 건가?

중년에 다시 쓰는 일기 (6)

by 다시

나름 젊었던 시절. 나이 든 상사들이 왜 등산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중 한 상사가 등산의 매력을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나이 먹으면 산에 가야 해. 산에 가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져."


... 하면서 말하는데 마치 등산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말했다.


나는 운동을 싫어하는 성격에 디스크도 있어서 등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왜 나이가 들면 산에 가는지...




1월 31일도 연가를 내고 제법 긴 연휴를 즐기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도 모두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신 덕분에 명절 행사도 일찍 끝내서 여유가 있었다. 1월 31일은 아이들도 돌봄과 학원을 가는 날이라 아내와 오붓하게 데이트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허락한 시간은 오후 2시까지였다. 아이들이 돌봄에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학원도 가까우니 알아서 가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아내는 거절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아내와

둘이 평소 좋아하던 맛집에 가서 아점을 해결하고, 뷰가 좋은 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고 나니 금방 아이들이 다가올 시간이었다.


"왜 벌써 이 시간이지?"


2시가 다가오면서 눈이 날리기 시작하자 아내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2시에 아이들을 맞이하고 학원에 보냈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돌아오기까지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 간식을 준비한다며 더 이상 나랑 놀아주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두고 나갈 수도 없어서 집에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청소를 하며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애들 왔다! 이제 나가자!"


나는 애들이 이제 곧 3학년이 되니 두고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거절했다. 아이들만 두고 외출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이날은 싫다고 했다. 그런데 얼핏 본 아내의 얼굴이 나랑 있을 때보다 생기가 있었다.


"애들이랑 있는 게 더 좋은가? 나한테 애정이 식었나...."


나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 혼자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눈을 밟으며 눈 덮인 동네의 풍경을 찍는 것이 재미있었다. 멀리 출사를 나가지는 못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집중하며 사진을 찍는 순간이 즐거웠다.


그런데, 그리 오래가지는 못 했다. 1시간 정도 그렇게 혼자 놀다가 지루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토요일 아침.

식구들은 다 자고 있고 혼자서 눈을 떴다. 잠은 이미 깼고... 뭐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거나 브런치를 쓰고 싶었지만 내가 바스락 거리면 잠귀가 예민한 아내는 잠이 깰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산이었다.


"동네 뒷산이나 가볼까?"


디스크도 있고, 관절도 좋지 않고, 눈이 많이 내려서 내 체력으로 산에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체력이 허락하는 범위까지만 올라가자... 하는 생각에 장비(?)를 챙겼다.


등산지팡이 두 개와 아이젠을 챙기고, 잠바도 두 개를 입고 집을 나섰다. 겨우 뒷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중무장을 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기왕 나온 거 일단 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산에 가보니... 그냥 등산화만 신고 다들 눈 덮인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운동 초보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종종 등산지팡이를 들고 오르는 분들이 있어서 그나마 좀 덜 부끄러웠다.




산 입구에 도착해서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아서 내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이 맛에 산에 오는구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인 느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순간.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놀아주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는 활동.

평지를 걷는 것과는 다른 묘한 쾌감.


그리고! 눈 덮인 설산의 아름다운 풍경!


동네 뒷산마저도 이리 아름다운데 이름난 산의 눈 내린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여태 정적인 취미밖에 없었는데 이제 등산 취미를 가져봐?"


정말 좋았다. 눈을 밟는 소리도, 모든 것이 눈 속에 덮여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도. 마음속에 있는 근심조차도 하얗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세상 그 어떤 아름다움을 설산에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평지가 나오면 숨을 좀 고르고, 내리 막길에서는 오르막보다 조심조심 한 발씩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체력이 허락하는 정도만 잠깐 걷다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경치에 취해... 사색에 취해

한 발만 더, 한 발만 더 하다 보니 정상이었다.


정상에 있는 정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또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더 걷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체력적으로 무리일 것 같았고 내려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했기에 하산을 선택했다.


숨이 차게, 심장 박동이 느껴지게 무엇을 해 본 기억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겨우 동네 뒷산이었을 뿐인데도 등산은 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줬고 혼자서 사색에 빠지기도 좋았고 한 발, 한 발 숨이 차다 보니

잡념을 떨치고 현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산책을 좋아하는데 평지를 걷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보니 산책을 하면서 온갖 생각이 떠올라 산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을 때면 헤드폰을 착용하고 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등산은 헤드폰이 없어도 현재 내 두 발에 느껴지는 촉감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안 그러면 다치니깐.



집에 들어온 나는 아내에게 소리쳤다.


"여보! 내일 등산 같이 가자!"


하지만 결과는 거절이었다. 이번엔 아이들 때문은 아니었고, 추워서 싫단다. 아내가 추위를 좀 많이 탄다.

집에 와서 등산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해 봤다. 나 같은 운동 초보에 허리디스크 환자가 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어 보였다.


뭐든 새로운 활력이 필요한 중년. 그러니 쉽게 재미에 빠져 들기도 힘든 중년.

등산은 나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어 줄 것인지 스스로도 궁금해졌다.


일단 평지부터 꾸준히 좀 걷고 근육 운동을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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