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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Oct 15. 2023

미워하는 마음

사랑했었고 미워했었고 그 후엔

오랜만에 아내의 꿈을 꿨다.


우리가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에 곧잘 입던 옷을 입고 아직 말도 잘 못하던 때의 아이를 안은 채로 같이 걸었다. 며칠 잘 안 써지던 글을 갑자기 몰아 써서 그랬을까. 꿈에서 보는 건 거의 몇 개월 만이네. 그래도 간만에 편하게 잠들었었고 깨어난 직후에도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뭉개는 시간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아내는 우리가 자리를 잡았던 동네에서 소박하게 아이들을 가르쳤었고 그건 아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해봤던 사업이자 결혼 후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다. 아직 제대로 된 집을 구하지 못했던 시절 우린 원장실에서 먹고자며 앞으로 살 곳을 알아봤었고 다행히 낯선 곳에서도 먹고 잘 수 있는 곳과 수입이 생겼다며 안도했었다.


꿈속에서의 아내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로 말은 없이 옹알이를 하는 딸을 안은 채 나는 내 일을 하러 걸음을 옮겼다.


시간 순서가 자연스레 섞인 날씨 좋은 어느 가을날의 꿈이었다.


사실 내일이 최종 판결일이다.


지난주 내내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불안증세에 시달렸었고 이때쯤이면 슬슬 또 제출되는 아내 측 법률사무실의 개소리 가득한 서류를 볼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금요일에 변호사를 통해 서류를 받았을 때 이제는 익숙해진 뻘소리들 끝으로 아내가 경영악화로 폐업을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아이의 양육비를 많이 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사실 여태까지 그렇게 원생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러건 말건 어떤 때는 내가 월세를 대신 줘가며서라도 계속 꾸려왔던 곳이었다. 비록 지금 이렇게 돼버린 사이지만 우리가 처음 같이 시작할 때의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또 하나 연결돼 있던 끈이 사라졌구나. 툭.


의아하긴 했었다. 사실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었기에 소송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내내 불이 켜져 있던 간판을 보며 대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뻔뻔하게 계속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을까 신기해했었다. 도라이다. 진짜 도라이다. 지나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지.


유일한 수입원이었고 몸이 약해 장시간 일할 수 없는 아내 입장에서는 자기 편의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게 눈치 보며 월급 받는 생활보단 나았겠지. 애초에 자영업과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이 그 이유 하나로 시작했었으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길에 불이 켜져 있는 아내의 학원을 보면 그래도 저 사람이 멀리 있진 않구나, 하는 안도감 비슷한 게 있었다. 무슨 이유가 됐건,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불이 켜져 있는 동안은 옛날 생각도 나고 어쩌다 길을 지나는 아내를 봐도 그냥 그걸로 좋았다.


어찌 됐건 행복했으면 좋겠다. 몇 달 전 아내에게 썼던 편지에 썼던 말이었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찢어버렸던 후에도 써지던 말이었으니 아마 앞으로도 진심인 말이리라.


비록 아내는 내가 학원 문틈에 꽂아놓고 갔던 그 편지조차 법원에 제출해 나를 상처 입히는 용도로 썼지만 진심으로 썼던 편지였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었다.


읽긴 읽었구나. 그러고 말았지.  


밉지 않냐고.


죽도록 미웠지. 지금도 밉지. 왜 안 밉겠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아쉽고.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다고. 막상 입을 열면 온갖 감정에 울음부터 나오겠지만.


그래도 미안했다고. 내가 철이 없어서 그만큼 당신이 힘들었었나 보다고. 건너 들은 얘기였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나와 결혼했을 거란 그 말 한마디로 내가 조금은 더 일어날 힘을 낼 수 있었다고.


묻고 싶은 것도 많지. 물어봐야 소용도 없는 그런 것들. 정말 원생이 없어서 문을 닫았냐. 양육비 줄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냐. 돈이 모자랐던 거냐. 왜 애는 못 키우겠다고 한 거냐. 나한테 왜 그랬냐. 많이 힘들었냐. 내가 그렇게 미웠냐. 후회하냐.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애써 되짚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을 때쯤 그때 가서 편지 한 장 쓸 수 있다면 그때는 미안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은 하지 않는 게 맞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내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된다. 나한테 그랬던 이유를 평생 모르고 살아도 된다. 어느 날 자연히 알게 되겠지. 미리 말해준다 한들 지금은 이해할 자신이 없다.


미안했다는 말도, 잘 살라는 말을 해줄 입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편지에 한 번은 써 보냈다.


서툴렀을지라도 그 당시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되려 내가 혼자였다면 못했을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었고 당신 덕분에 항상 힘낼 수 있었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딱한 일을 당했다는 얘길 들어도 걱정해 주는데 내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아는 사람 행복 한번 빌어주는 게 그리 이상할 일인가.


예전에 알던 형 한 명이 딱 그런 성격인데 어차피 남한테 맘 쓸 거 없다, 세상 혼자 사는 거다, 남 백날 믿어봐야 뒤통수나 친다, 당한 만큼 갚아줘야 된다, 이런 얘기들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불쌍한 사람이었다.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속마음 확인하려 들고, 조금 얌전한 사람 만났다 싶으면 표정 할 때까지 속을 슬슬 긁어대는. 사실은 자기가 제일 외롭고 사람을 그리워했으면서.


언젠가 그 형은 내게 그건 내가 세상을 덜 살아봐서 그렇다고 얘기했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겪으면서 살았는지 알고 있느냐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느냐고. 그땐 그냥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나 보다 이러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대답해 줄 수 있지. 이제는 당시 그 형 나이랑도 얼추 비슷해져 가니까.


형은 형이 남 대하던 딱 그만큼 돌려받은 거라고. 형 인생이 시궁창이었던 건 형 같은 사람들 모여있던 곳이 딱 거기 지하 도박장이었으니까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끝났던 거라고. 사실 사람들은 형 생각보다 따뜻하고 형이 걱정하는 것보다 남한테 관심 없다고. 형 혼자 만든 세상에서 형 혼자 역할놀이 하고 있었던 거라고.


요즘은 건너 건너 소식 들으면 적당히 유유자적하며 도인처럼 지낸다던데 어째 팔자 사나운 사람들의 말로는 죄다 절간행이다.


그래도 고마워요 형. 구렁텅이라는 게 뭔지 형이 나한테 몸소 보여줬던 덕분에 그동안 딱히 나쁜 길로 안 빠지고 살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어요. 형은 나름의 등불이었어요. 가지고 있던 불들이 모두 꺼져서 아주아주 어두울 때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던 등불. 진심이야.


몇 번의 연장 끝에 지금까지 왔지만 슬슬 끝이 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집주인에게서 얼마 전 집을 내놓기로 해 집을 옮겨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슬슬 지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려 하던 찰나에 아이의 양육권이 내게로 왔다. 은행에서 과장이 찾아와 사업 형태를 조금 바꿨으면 좋겠다며 시간 내서 방문을 해달라는 부탁 비슷한 통보를 받았다.


이미 너무 길어진 소송에 내 변호사는 어떻게든 이번에 사건을 종결지을 생각이라고 의사를 전해왔다. 아마 그건 상대 사무실도 마찬가지일 거라며. 주변 상황들에 뭔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나마 뭔가 움직이는 시기라는 느낌이 든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래. 이래놓고 또 연장될 수도 있겠지. 그래봤자 몇 번 안 남았다. 마음의 준비도 어느 정도 했고 준비는 평생 완벽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받아들였다.


그래도 결국 내 마음은 제자리를 찾아가리라고. 조금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더라도 닿는 대로 걷자고. 비단 이혼뿐만 아니라 겪어내야 할 일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서있지만 그 안에서 빛을 찾아내길. 그래도 결국 상냥함만은 잃지 않길.


팀장에겐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갑자기 내가 연락두절되면 찾지는 마시고 집주소로 순찰차나 한대 보내달라고 농담했었는데 옆에서 듣던 부장님까지 사색이 되어 젊은 사람이 그런 생각하면 안 된다고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제법 웃었다.


미련도 미움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그래야 앞으로 나가는 걸음이 가볍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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