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온 Oct 15. 2023

장서갈등

다시는 이런 얘기할 일 없길 바라며

내가 진짜 남한테 이렇게 말해본 게 20대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부디 내 안에 아직 그 시절 패기와 독기가 이 글을 끝마칠 정도만큼만 남아있길 바라며 이 프로젝트 마지막 글을 써본다.


역시 끝은 지저분해야 재밌지. 마지막 불놀이.


비위 약하신 분들은 뒤로.


오늘까지만 장인어른이라고 부를게요. 내일부터는 아저씨 될 거 같으니까.


글로 쓰는 거라 참 다행입니다. 글로 쓰는 건데도 지금 손가락이 덜덜 떨리거든요. 실전이었으면 욕부터 나왔겠죠. 아시잖아요 내 옛날 성격. 그래서 대놓고 결혼 반대하셨었잖아. 뭐 우리 집안이랑 기질이 안 맞대나 뭐래나. 그동안 나 많이 참은 거 아시잖아요. 나 착한 사람으로 지냈잖아.


전에 우리 애 숨기고 계셨을 때. 내가 애 끌어안고 그냥 보내달라고 울면서 말했을 때. 기억나시죠. 안 난다고 말해봐요. 그럼 대화는 여기까지야. 제 목 조르면서 저한테 네가 날 언제 장인어른으로 생각한 적은 있냐고 하셨죠. 내가 분명히 말해줄게요.


나랑 관계없는 사람이 나한테 그런 짓 했으면 지금 멀쩡히 밖에 못 돌아다녀요. 미치지 않고서야 남의 딸을 몇 개월 동안 숨기고 도망 다니는 인간이 어딨어. 당신 죄지은 거예요.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딸이 정신 나간 짓 벌리는데 그걸 동조를 하고 있어요. 내가 솔직히 말할게요. 내가 그동안 애엄마 좀 이상한 거 알면서도 그냥 같이 살았어요. 같이 산 정도가 아니라 해달라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다 맞추면서 살았어요. 내가 결혼하자고 했는데 누굴 원망해. 그런 사람이라도 내가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참았다고.


당신 딸이 참고 산 거 같죠. 자기 딸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치신 거예요. 나도 딸 있어서 뭔지는 알겠는데 선을 씨게 넘으셨어요. 어디 딸내미 사는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앉아 있어요. 거기 우리 집이었어. 당신한테는 엄밀히 말하면 남의 집이라고. 온다고 말이라도 하고 오던가. 눈치가 있으면 대충 인사 끝내고 집으로 가시던가. 뭐 한다고 맨날 퍼질러 앉아있어요. 당신 집 있잖아요. 싯팔 굳이 우리 집 근처까지 이사 왔던 그 집.


남의 집 왔으면 조용히 차나 마시다 갈 것이지 사사건건 간섭은 왜 해요. 그렇게 더러워 보이면 바닥이라도 한번 닦아주고 얘기하시던가. 내가 샀던 밀대 시원찮아 보인다고 가져가셨대매. 그러면 새거 갖다 놓으셔야지. 그거 내가 마트에서 돈 주고 사 온 건데 들고 가더니 소식이 없어. 3년 전 일인데도 얼탱이가 없네.


우리 집 개들 똥 너무 많이 싼다고 두 마리만 어디 보내라 그랬죠. 나 그거 농담인 줄 알았어요. 1년 넘게 얘기할 줄은 몰랐지. 남의 집 개사정까지 간섭할 거라는 생각을 세상에 누가 해요. 그래놓고 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그럼 내가 거기서 아이고오 알겠습니다 이러고 개 두 마리 줄여요? 당신 딸은 그러라고 하더라고. 좋겠네요. 말 잘 듣는 개는 그 집에서 키우셨네. 그게 그렇게 자랑하는 그 집안 가풍이신가 봐요.


집안 얘기 나왔으니 한번 얘기할게요. 족보 갖고 와봐요. 누구 집안이 더 잘났나 한번 보게. 우리 집 나름 명가예요. 어디서 싯팔 근본도 안 되는 가문이 집안 얘기를 해. 우리 집 가풍이 원래 자급자족이라 집안 안 끌어들이는 거예요.


딸이 합의이혼할 거라고 법원 가서 서류 떼오는 걸 앉혀놓고 자총지총 물어볼 생각을 해야지 뭐 잘났다고 같이 따라가서 이죽거리고 있어요 이 장인어른아. 그래놓고 이혼하는 게 더 낫다 이 소리나 하고 있었죠. 이혼해봤어요? 뭐 근처는 가보고 하는 소리예요? 아 그거 때문인가.


두 집 살림하셨대매. 마누라 한 명 더 있으시대매. 본처랑 사는 게 지겨워서 이혼을 동경하셨나 봐요. 우리 아버지도 예전에 노래방 도우미랑 놀다가 걸려서 우리 어머니한테 뒤질뻔한 적 있으시거든요. 난 바람피우신 적 있으시다길래 그런 건 줄 알았지. 대단하세요. 말단 공무원 월급 박봉이셨을 건데 어떻게 그 돈에서 두 집 살림비가 나왔을까. 수완이 좋으셨나. 매력이 있으셨나. 지금은 가운데 휑하시잖아요. 그땐 인물 좋으셨었나 봐.


월급 얘기 나오니까 또 재밌네. 어느 날 나한테 집으로 오라고 했죠.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난 또 급하게 갔지. 월 얼마 버냐고요? 내가 말 안 하니까 돈 안 될 것 같으면 사업 접고 그냥 회사가라고 했었죠. 우리 아버지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 안 했었어요. 내가 우리 아버지 평생 싫어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어.


내가 그때 얼마 벌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 벌고 있다 그러면 뭐 하려고 했어요? 나 지금 와서는 당신들한테 내 수입 공개 안 했던 거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법원에 싸질러놓은 말들 보니까 가관이더만.


내가 당시에 아무리 못 벌던 달을 골라도 당신이 받던 말단 공무원 월급보다는 많았어요. 앞으로도 어디 가서 돈 얘기 하지 마세요. 당신 자격 안돼. 내가 그런 쪽으로 잘 아는 건 아닌데 그런 내가 봐도 당신은 팔자에 돈이 없는 사람이에요. 어디 가서 쪽팔리기 싫으면 돈 얘기 하지 마세요.


나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당신은 두 집 살림하느라 바빴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재밌고 멋있게 살아보려고 진짜 다 갈아 넣었어요. 나 회사에 그대로 있었으면 지금 차장에 최연소 부장은 맡아놓은 사람이었어요. 좀 더 재밌게 살아보려고 나온 거야. 돈은 덤이고. 근데 집안에서 해준 집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어슬렁거리며 살던 사람이 무슨 내 인생 조언을 해.


진짜 그동안 내가 들었던 족까는 소리들 다 늘어놓으면 밤샐까 봐 접어요. 딸 생각하는 척하고 있어. 그래놓고 애엄마한테도 실패한 인생이니 이 꼬라지로 살 거 같았으면 괜히 정성 들여 키웠다는 개소리 했대매. 당신이 그딴 소리 씨부릴 때가 우리 결혼생활 중에는 제일 재밌을 시기였어. 우리 매일 재밌었어.


괜히 지가 정년퇴임하고 할 거 없으니까 이집저집 들쑤시고 다니던 거 참아줬는데 눈치는 존나 없어요. 그러니까 머리 빠진 거예요. 벌 받은 거야 그거.


내가 우리 애한테 할배 욕은 안 할게요. 당분간은. 애가 충격받을까 봐 내가 웬만하게 걸러서 말할게. 근데 평생 기억해요. 그날 네가 우리 애 얼굴에 흉터 남겼어. 당신이 애 숨기지만 않았어도 내가 찾아갈 일 없었고 조용히 데려가게 뒀으면 되는 걸 네가 애 억지로 뺏으려다 애 얼굴에 흉터 남긴 거야. 법원에는 내가 했다고 했더라. 경찰들이 그때 확인 안 해줬으면 나 평생 억울할 뻔했잖아.


얼마 남지 않은 머리 하얗게 샜던데 달게 받으세요. 조금은 더 고생해 보세요. 어차피 갈 날 얼마 남지도 않았을 거 같던데 괜히 설치지 말고 조용히 참회하다 가세요. 요즘도 가끔 그 집에 갔다 오는 것 같다던데 적당히 하시고.


웬만하면 앞으로 말 섞을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애 데리러 갈 때마다 본전도 못 찾을 얘기 자꾸 씨부리지 마시고. 애 앞이잖아요. 눈치 없는 양반아. 애가 모를 거 같냐고.


사과는 됐으니까 조용히 살다 가세요.



진짜 신기하죠 장모님. 오늘까지만 장모님.


앞에서 그렇게 욕을 하고 왔으면 지칠 법도 한데 장모님을 떠올리니까 없던 힘도 샘솟아요. 나 이렇게 할 말 많은지 몰랐네. 나 이거 다 끌어안고 조용히 살 뻔했잖아.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여기 계셨네.


나는요, 장인어른보다 장모님이 더 싫고 한편으로는 더 불쌍해요. 겉치레 좋아하셨잖아요. 어때요 지금. 딸내미 하나 있던 거 자기 인생만큼 불쌍하게 만들고 나니까 마음 편하세요? 이제 만족해요?


솔직히 그동안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들 내가 했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셨잖아요. 난 장모님이 진짜 귀가 안 좋아서 말귀를 못 알아듣나 보다 했어요. 애엄마도 가끔 그러길래 물어봤더니 자기도 귀 안 좋대요. 근데요 저번에 건강검진받은 서류 보니까 청력 정상이래요. 문제가 청력이 아니래요.


그 얘기 아세요. 어느 날 원숭이 한 마리가 배를 타고 가다가 어느 섬에 도착했는데 거기 사는 원숭이들은 눈알이 하나였대요. 그 섬 원숭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눈알 두 개인 원숭이를 놀리는 거예요 괴물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게요. 그 원숭이가 결국 자기 눈알을 하나 뽑았대요. 얘기는 여기서 끝나요.


내가 항상 느끼던 기분이 그거였거든요. 근데요. 나는 그거 뒷얘기 알아요. 이제 자기도 눈알이 한 개니까 같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원숭이가 다가가니까 원숭이들이 다시 그 원숭이를 쫓아내요. 이번엔 흉터가 너무 끔찍하대요. 그래서 결국 그 뒤로 그 원숭이를 섬에서 볼 수가 없었어요. 어때요. 그래서 내가 내 눈알 안 뽑은 거야.


이런 얘기 싫어하시죠. 막 눈알, 흉터 뭐 이런 거. 메타포 이해 못 하시잖아요. 그래서 우리 항상 대화 안 됐잖아요. 근데 누명은 씌우면 안 되지.


됐고 자식 키우는 얘기나 마지막 길에 해줄게요. 비싼 얘기니까 잘 들어요. 나 나름 명문대 당해 최연소 졸업생이야. 몰랐죠. 난 그런 거 나불대는 성격 아니니까. 공부 많이 했던 사람이 해주는 얘기예요.


부모가 애들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기본적인 안전과 생존이에요. 재워주고 먹여주고. 마지막으로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 입장에서 지지해 주는 거. 잘 들어요. 아동교육 어디 딴 데 가서 받으려면 비싸요. 긴 거 아니니까 잘 들어요. 엄한데 쓰고 다니지 말고.


최종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이의 독립이에요. 한 개체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그때까지만 부모가 필요하다구요. 아 물론 한 번에는 힘들죠. 몇 번 다시 찾아오겠죠. 그때도 잠시 쉴 시간만 내어주면 돼요. 애들은 생각보다 강해서 항상 어른들 예상보다 빨리 회복하고 또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요. 인간이 그렇게 발전해 왔잖아요.


당신 딸이 그 나이 되도록 다시 당신 집 한구석에 들어와 있으면 본인 잘못도 조금 생각해 보세요. 반찬 싸다 주고 집 청소 대신 해주고 그럴 필요 없었어요. 당신은 선의였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행동들이 자식 갉아먹어요. 왜 그걸 남의 탓으로 돌려요. 막말로 이혼하고 혼자 나가 살고 있었으면 내가 말도 안 해요. 이게 뭐야. 3대를 곱창내면 어떡해요. 무슨 그걸 또 동조하고 있어.


당신 문제 있으세요. 바람피우고 돌아다닌 건 저 아저씨 맞는데. 근데, 내가 이런 말 해서 진짜 미안한데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공동책임이에요. 잘못은 없어도 책임은 있어요. 그거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딨어요. 내가 지금 겪고 있는데.


저 아저씨 딴 집 못 가게 하려고 맨날 애 돌보게 했잖아요. 우리 애를 족쇄로 쓰셨잖아요. 우리 애 이제 말 잘해요. 우리 애한테 소리 지르셨대매. 우리 애가 구슬 좀 엎지르더니 벌벌 떨면서 저한테 죄송해요라고 했어요. 싯팔 대체 무슨 짓을 그동안 하신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제라도 애가 우리 집 오게 돼서 저는 다행입니다. 홀애비 손으로 키운 딸이라도 그 집보다는 나을 거 같아요.  


나 이런 얘기 법원에 한마디도 안 했어요. 왠 줄 알세요?


괜히 당신들 딸내미 멘탈에 빵꾸냈다가 집안 분위기 박살 나면 우리 딸은 누가 지켜줘. 당신들 딸이 내 딸 때린 건 알고 있어요? 뭐 중요하겠어요. 어차피 나 닮아서 싫대매.


빨리 내 딸 보내주시고 위자료는 됐으니까 애 양육비나 똑바로 보내요. 나한테 양육비로 딴죽 잘도 걸던데 당신들은 얼마나 잘 보내는지 내가 지켜볼게. 나는 내가 그렇게 힘들 때 내 아끼던 물건들 팔아가면서 양육비 맞췄거든요. 한 달에 20만 원 보낸다고 했대매요? 미안한데 요즘은 최소가 60만 원쯤 되니까 알아서 맞춰보세요.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셨잖아.


지켜볼게요.


아 다행이다. 성질 다 죽은 줄 알았네.


딸, 아빠 아직 괜찮다. 몇 년은 걱정 없겠다. 잘살자. 재밌고 행복하게.


끝.


 



이전 29화 마지막 글을 쓰기에 앞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