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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듬 Jul 15. 2023

화장품 덜어내기

줄일수록 가벼워지는 삶의 무게

나는 패션을 좋아하는 만큼 뷰티에도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메이크업에 관심을 가졌고, 다 쓰지도 못할 화장품을 종류별로 수십 개씩 사모으곤 했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너는 대체 립이 몇 개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한 듯 안 한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추구했기 때문에 신경 써서 화장하면서도 과해 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화장을 안 한 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메이크업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최소 30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흔히 하는 ‘여자들은 외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로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시간들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유롭고 느긋하게 준비할 뿐, 화장에 많은 시간을 쏟지 않는다.


미니멀 메이크업이 가져다준 효과는 분명했다. 화장을 줄임으로써 절약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1. 돈


한국의 화장품들은 놀라울 만큼 질이 뛰어나고 가격도 저렴하지만, 그걸 핑계로 야금야금 쓰는 돈이 주기적으로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큰 금액이 된다. 담배 한 갑과 같은 무의식적 소비는 지갑에서 돈이 줄줄 새게 만드는 주범이다. 색조화장품은 담배만큼이나 무익하며 중독적이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 돈으로 주식이나 살 걸 그랬다며 한탄했다. (물론 주식도 위험하지만...)


2. 시간


화장의 단계가 많아질수록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러나 소요되는 시간에 비해 나타나는 효과는 너무나도 미미하다. 내가 오늘 하이라이터를 했는지, 눈 밑에 글리터를 발랐는지, 블러셔를 했는지 안 했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또, 메이크업은 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무너지는지 몇 시간마다 수시로 체크해줘야 한다. (공들여한 화장이 쉽게 무너져버리는 순간 기분마저 처진다.) 화장이 잘 먹은 날에는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는지도 생각해 보면 메이크업과 관련해 쏟게 되는 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내게 맞는 화장품을 찾아내느라 고민하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고작 두 가지지만 돈과 시간의 가치를 환산해 봤을 때 화장을 함으로써 낭비되는 자원은 굉장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난 이렇게까지 화장을 해야 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깨끗한 맨얼굴을 좋아한다.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 어른들이 너희 나이 땐 화장 안 한 얼굴이 제일 예쁘다는 말을 해줬던 것과 같은 마음이다. 내겐 모든 사람들의 맨얼굴이 가지각색 매력적으로 보인다. 화장이 그 사람의 매력을 크게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화장의 유무에 따라 타인의 면전에 대고 불쾌한 말을 내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절대 모든 색을 쓰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섀도우 팔레트를 샀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많은 화장품을 버리게 됐다. 쓰지 않지만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화장품,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이 한 무더기가 나왔다. 제대로 쓰지도 않을 화장품을 이렇게나 많이 모아둔 건 분명 내면 깊이 내재한 외모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거다. 그 시절의 나는 확실히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에 뭐라도 바르지 않으면 집 앞 슈퍼도 제대로 가지 못할 만큼 내 얼굴을 부끄러워했다. 사소한 지적들은 내면에 쌓여 나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었고, 화장이라는 얇디얇은 방패 없이는 밖에 나가기 어렵게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동네를 활보해도 아무렇지 않다. 누군가 내게 한 소리 한다면 맞받아쳐줄 만큼 마음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클렌저 하나로 쉽게 무너져버릴 화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종종 가벼운 화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맨얼굴로 가볍게 나서는 일이 훨씬 많아졌고, 그게 더는 두렵지 않다.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의 편안함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마스크나 컵에 화장품이 묻어나지 않고, 번질 일도 없으며, 지워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언젠가는 무색 립밤만으로도 어디든 즐겁게 외출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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