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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뜨로핏 Rettrofit Oct 09. 2024

EP1. 당근밭에서 함부로 타자기를 캐지 마라

타자기와의 첫만남


요즘은 인공지능(Ai)이 내가 말하는 음성만 듣고도 채팅창이나 문서에 글을 입력해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나도 이런 기술발달의 수혜를 적지 않게 누리고 사는 사람이다. 특히 운전 중에 업무상 급한 메신저 회신을 해야 하는 경우에 정말 유용하다. 내가 발음만 잘하면 스마트폰 음성인식 기술로 간편하게 문자를 입력하여 상대에게 보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93년만 해도 이런 기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꿈같은 일이었는데, 지금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1993년이란 시기를 언급한 이유는 이거다. 대학수능고사도 아니고, 마지막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시기이다. 그 당시에는 과제로 나온 리포트를 수기(修己)로 작성하여 제출했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리포트도 ai가 작성을 해 준다는데, 아마도 지금 대학생들이 듣는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지도 모른다.  수기로 작성하던 90년대와 인공지능으로 글을 쓰는 지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문자생활상이다.


               

혹시나 하고 검색해 봤는데 아직도 레포트지가 판매는 되고 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5년에 처음으로 나는 '타자기'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같은 학과 선배가 가지고 있던 삼성 전자타자기 TQ-12A. (엄밀히 말하면 수동타자기가 아닌 전동타자기였다) 타자의 '타' 자도 모르던 내가 리포트 작성을 위해 선배의 전동타자기를 빌려 딱 한 번 써 본 것이 전부다. 그것이 내가 (과거에) 타자기를 접해 본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일이 내가 타자기를 광적으로 수집하고 탐구하는 덕후가 되는 계기는 아니었다. 그 이후에 타자기는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버렸다.




첫 타자기를 만나다.

  1995년에서 다시 25년 뒤로 돌아와서 때는 2020년 7월의 어느 날.  그때는 늦장가를 가서 유아기의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고,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서 아이들의 장난감을 사고, 팔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장난감 거래를 위해 거주지역의 당근마켓을 보던 중에 수동타자기 매물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가격은 15,000원이다. 뭐 내 입장에서 그리 부담되지 않는 가격이다. 장난감 삼아 사서 좀 가지고 놀다가 되팔던지, 버리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타자기를 구매하기로 했다.  그것이 앞으로 내 일상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모르고 나는 약속장소로 나갔다. 첫 타자기여서 그런지 4년이나 지났지만 거래 당시 상황이나 장소 등 대부분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긴 생머리의) 여성이 다소 무거워 보이는 듯한 엉거주춤한 포즈로 타자기를 낑낑거리며 들고 약속장소로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 벼룩시장에서 구매했다는 히스토리를 알려 주었고, 집이 비좁아 정리하기 위해 처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작동법은 잘 모르니 그냥 인테리어용으로 사용하라는 말을 남기고, 판매금액인 15,000원을 입금받고는 돌아서서 금세 가버렸다. 타자기는 꽤나 묵직했다. 묵직해서 더 기분이 좋았다. 그 묵직함이 왠지 모르게  내가 치른 적은 금액보다 더 값어치 있는 물건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컬러는 파스텔톤의 카키색인데, 은은한 유광의 도장을 입힌 금속바디와 초콜릿컬러의 키캡의 배색이 너무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타자기였다. 어쨌든 득템이었다.




내 성향과 맞는 취미와 닉네임

 첫 타자기를 구매해 와서 내가 무엇부터  했을지 설명하기 전에 ,,, 나의 닉네임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타자기 동호인들 사이에서 내가 쓰는 닉네임은 "레뜨로핏 Rettrofit"이다. 영어사전을 검색해 보면 'Retrofit'(레트로핏) 이란 단어가 있다.  나는 이 단어를 보는 순간 딱 이거다 싶었다. 오래된 물건을 개량해서 사용하는 일은 내 성향과 너무나 잘 맞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성향은 나의 부친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방직공장에서 배 짜는 기계의 경정비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드라이버, 칼 같은 수공구를 자신의 손에 맞게 직접 제작하여 쓰실 만큼 손재주가 있는 분이셨다. 젊은 시절(아마도 30대 초반)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 중에는 언제나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고, 기름 쳐서 번쩍번쩍 광이 나도록 새것처럼 만드는 모습이었다. 성취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이것 좀 보라 하시며 조금만 손보면 이렇게 새것처럼 만들 수 있다며 뿌듯해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였는지? 내가 얼마나 어린 시절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깨너머로 봐 왔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과 성향은 종이에 잉크가 스며들 듯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스며들었으리라. 1940년대 말에 태어나셔서 195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모든 부분에서 물자가 부족한 시절에 성장하셨다. 아끼고, 고쳐 쓰고, 쓸만한 물건은 뭐 하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시절을 살아오셨기에 굳어진 성향을 결국 고스란히 내가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더욱 감사한 것은 그 좋은 손재주도 같이 물려주신 것 같다.




  사실 처음 쓰고 싶었던 닉네임은 내 이름의 이니셜을 넣어서 "레트로케이(Retro_K)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타자기 동호인 사이에서는 많이 알려진 타자기 수리 판매업체인 '레트로케이'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다른 단어를 검색하다가 찾은 것이 '레트로핏'이다. 그런데 이 네이밍 또한 사용하고 있는 다른 업체들이 적잖이 있어서 나중에 혼란을 피하려면 조금 차이를 주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스펠링에 't'를 하나 더 넣어서 된소리 발음이 나도록 해서 '레트로 retro'를  '레뜨로 rettro'로 발음이 나도록 했다.  오히려 된소리 발음이 더 레트로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렇게 탄생한 닉네임이 "레뜨로핏"이다. 앞서 나의 닉네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타자기에 빠지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레트로핏'이란 단어의 의미에서처럼 오래된 물건을 개량하거나 새것처럼 만드는 일이 나의 성향과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자기와 관계 맺기

다시 돌아와서, 단돈 15,000원에 당근밭에서 캐어 온 이 이름 모를 타자기를 집으로 가져오자마자 케이스에서 꺼내어 이리저리 살피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까 밖에서 거래할 때는 몰랐는데, 실내에서 꺼내어보니 오래된 미싱 같은 것에서 나는 기계용 기름냄새 같은 것이 난다. 그런데 그 냄새가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케이스의 마감이나 완성도 또한 나쁘지 않았고,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상태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판매자가 작동여부를 모르겠다고 하였으나, 만져 보니는 타자기는 전혀 문제없이 작동한다. "오예 ~!!!"  땡잡았다. 하지만 잉크리본이 너무 말라서 종이에 글씨가 잘 인자(印字)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색을 하여 잉크리본 판매자의 물건을 어렵지 않게 찾아 주문을 하였다.  잉크리본은 주문하였고,  이제 타자기를 좀 더 꼼꼼하게 알아보기 시작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처음 만나면 고향은 어디며? 학교는 어딜 나왔고,,? 등등 호구조사를 하듯이 나도 구글링을 통하여 이 타자기의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단서라고는 타자기의 전면부에 있는 영문 "Optima"와 타자기 뒷면에 있는 "Elite 3"가 전부였다. (단서가 적으니 오히려 더욱 이 타자기의 정보를 찾고야 말겠다는  욕망? 승부욕? 이 끓어올랐다. ㅋㅋㅋㅋㅋ)


일단 구글 검색을 해 보니 의외로 쉽게 타자기의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영어로 되어 있는 검색결과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편리한 번역기능을 이용하니, 어렵지 않게 이 옵티마 엘리트 3 타자기의 히스토리를 알 수 있었다. "오호라~!!!" 시리얼 넘버를 통해 1950년대 중반에 동독에서 제작되었으며, 이베이에서 거의 300불 선에서 거래가 되고 있는 타자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옵티마 optima'라는 타자기제조사는 원래 서독의 '올림피아 olympia'라는 타자기제조사와 같은 회사인데, 2차 세계대전 후 동독과 서독으로 갈리면서 상표권의 문제로 동독에서는 옵티마로 타자기를 생산했다는 이야기나, 옵티마도 기존의 올림피아사와 동일한 타자기의 설계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등등의 히스토리를 알아가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타자기라는 물건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정보들이 너무도 흥미로웠고, 검색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수집을 하던 끝에 올림피아 SM3도 수집하여 elite3와 함께 찍은 투샷



감각을 깨우는 힐링의 시간

 타자기에 종이를 넣고 타이핑을 하면서 느끼는 감각과 감성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한 타. 한 타. 손가락 끝으로 키 key를 누를 때 손끝으로 느끼는 키의 압력과 함께 활자가 둥글대 위에 말린 종이를 때리는 타격의 진동이 전율처럼 다가왔다.  활자가 종이에 찍힐 때 나는 타건음이 귀를 자극하는데, 이 소리가 소음처럼 들리기는커녕 힐링이 되는 소리로 들렸다. 또한 프린트한 것처럼 종이에 깔끔하게 인자되는 결과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쌓여있던 번뇌가 사라지는 후련함 마저 들정도였다. 이 정도면 타자기의 매력에 빠진 게 아니라 생포된 것 같다. 생각해 보니,


타자기를 치는 행위에 나는 내 몸의 모든 감각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오타 없는 정확한 타이핑을 하기 위해 두뇌의 모든 신경을 타이핑 행위에 집중하는 지각(知覺)

손가락 끝에서 자판의 표면을 적절한 압력으로 눌러주는 촉각(觸覺)

타이핑 시 키캡 위에 마킹되어 있는 글씨와 활자가 종이에 찍힌 결과를 확인하는 시각(視角)

활자가 종이와 둥글대를 때릴 때 나는 타건소리, 여백 설정이 다 되었을 때 나는 마진벨소리 등 타자기가 작동되면서 나는 다양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나는 작동 소리 등을 듣는 청각(聽覺)까지 실로 많은 감각을 동원하여 타이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잉크리본 교체하기 전에 찍은 타이핑 사진잉크리본 교체하기 전에 찍은 타이핑 사진



 이렇게 우연히 시작된 타자기의 구매는 나를 계속 당근밭 근처에서 서성이게 했다.  서울이라서 그런지 당근밭에서 타자기를 키워드로 검색하니 (지금은 전반적인 시세가 꽤 올랐지만) 4년 전인 당시에는 꽤나 저렴한 매물들이 올라와 있었다.  중고거래 플랫폼의 수많은 매물 중에서 타자기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매물은 아니라서 그런지, 경쟁 또한 그리 심하지 않았다. 당근밭뿐만 아니라 중고품 거래 카페에서도 타자기로 검색을 하니 매물들 많이 보였다.  자금이 없을 뿐이지 그림의 떡 같은 매물들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당시에는 머릿속에 온통 타자기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당근어플 알림에 온 감각이 집중되어 있었던 덕분인지, 정말 저렴하게 나온 행운의 매물들을 싼값에 가져올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당시 가장 싸게 구매했던 타자기는 단돈 8천 원을 주고 산 크로바 탑스타 topstar 10s 한글 두벌식타자기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출근하기 위해 노량진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을 하고 있던 중에 알람이 울렸다. 처음에는 판매자가 8만 원을 잘 못 기입해서 올린 줄 알았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8천 원이 맞았다.

그리고 이미 나는 채팅버튼을 눌러 판매자와 거래시간을 합의하고 예약을 걸어달라고 하여 경쟁자를 미리 차단시켰다. 즐거운 마음으로 룰루랄라 출근을 하고 룰루랄라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하자마자 거래 장소로 달려갔다. 타자기의 상태나 작동여부가 불안하기보다는 너무 싸게 팔아서 혹시 판매자의 마음이 바뀔까 봐 그것이 더 불안하였다. 하지만 마음씨 선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타자기를 들고 나와 8천 원을 받고 건네주셨다. 너무 소액이라 현장에서 온라인 송금을 해 드리는 것은 거래 매너가 아닌 듯하여 현금을 준비해 갔다. 그렇다고 만 원짜리를 내밀며 2천 원 거슬러 달라고 하는 것은 더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5천 원짜리와 천 원짜리 세장을 깔끔하게 챙겨가서, 거래시간을 단축시키고 얼른 타자기를 받아서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 보니 타자기를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았는지, 상태가 너무 좋았다. 사람들은 보통 이럴 때 이런 말을 한다. "심봤다~!!!"  


그 당시 구매한 TOpstar 10s는 아니고 한참 뒤에 구매한 동일모델이다.

         

정말 그렇게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횡재한 기분이었다. 이 후로 두 번 다시 이런 횡재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귀신에 홀린 듯이 내가 사는 지역의 당근밭에서 3만 원 이하의 저렴이 한글, 영문타자기 매물들을  쓸어 담듯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폭주의 시간은 금세 흘러갔고, 그 해 11월에 네이버에 있는 "타자기사용자모임" (약칭 '타사모') 카페를 알게 되었다. 카페회원으로 가입을 하고 카페에서 이런 저런 타자기에 대한 정보를 배우고 익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카페에 올려진 선구자들의 글을 읽으며 정보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가입인사 후에 거의 댓글을 달거나, 정보 읽기 위주였다.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나도 타자기를 소개하는 게시글을 올린다. 나의 첫 타자기인 옵티마 Optima 엘리트3 ELite3를 소개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그 당시 게시글을 보니, 이미 12월에 나는 한글, 영어타자기가  합이 12대를 가지고 있다고 써 놨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7월에 1대로 시작해서 12월까지 약 5개월 동안 타자기를 12대로 늘였을 만큼, 열정적으로 타자기수집에 심취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수집은 좀처럼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 채 4년이란 시간이 지나왔다.  



아끼는 것이 많아지니 위협으로 다가왔다.

 타자기 개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관리가 필요해졌다. 엑셀파일에 수집하는 타자기의 정보를 입력하며 관리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것도 소홀해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정확한 타자기의 개수도 파악이 되지 않을 만큼 많아졌다.  

아들이 엄마의 핸드폰으로 보낸  카톡 협박

대략 어림잡아도 이제 100대는 족히 넘긴 것 같다. 제작된지 100년이 넘은 타자기도 서너대 되는 것 같다. 박물관에서나 소장할 만한 희귀한 기종의 타자기도 몇 대 수집했다. 타자기가 100대 정도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들 깜짝 놀란다. 당연한 반응이다. 가정집에 타자기를 100대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그러면서 다들 농담으로 나중에 타자기박물관을 차리라고 권하기도 한다. 100대 정도의 타자기를 수집하면서 자금도 막대하게 들어갔다. 타자기를 구입하는 비용부터 수리에 목돈이 들어가는 한글개조 작업까지 언제 시간 내서 정확하게 산출을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얼마의 자금이 들어갔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래도 어디까지 이것은 취미생활이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취미생활에 필요한 자금은 나의 용돈에서만 지출한다는 원칙하에 이것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왔다. 술, 담배도 하지 않는 아저씨의 건전한 취미생활인데, 뭐라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자금도 자금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공간이 없다. 공간적 한계에 달하자 그동안 아무 말없이 나의 취미생활을 지지해 주던 배우자도 이제 집이 비좁다며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그만 좀 사라고!!! 이제 좀 정리하고 내다 팔라고,,,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10살짜리 아들 녀석에게 타자기가 인질? 아니 '볼모'가 되기도 한다. 이 영악한 어린이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엄마의 카톡으로 아빠를 협박하는 레퍼토리로 타자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잃을 것이 많은 자가 불리하다고 했던가?? 하...(깊은 한숨) 그래,,, 아빠들은 약하다. 밖에 나가면 처자식 보호하려고 약해지고, 집에서는 내 애장품도 보호해야하니 아들래미한테도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이 자식 나중에 여친 생기면 복수해 주겠다)

 

선택과 집중도 해야했다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취미부자였다. 대학에 가면서 취미생활이 더 본격적으로 다양해 진것 같다. 그 중에서 기타 Guitar 를 치는 취미활동은 중학교 때 시작하여 대학시절 밴드활동을 거쳐 직장 내 동호회에 밴드활동까지 꾸준하게 이어온 취미생활이었다. 의욕만 가지고 이어온 취미생활이라, 언제나 실력은 미천했으나, 나름 재미를 가지고 해 왔던 취미생활이었는데, 타자기가 들어오면서 기타는 하나 둘 당근마켓으로 처분되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일렉기타와 일렉기타에 필요한 (이펙터 같은)악세사리를 중고로 수집하는 것이 외로운 총각의 낙이기도 했다. 부족한 실력을 '장비빨' 로 만회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이런 저런 기타를 많이도 사 모았던 것 같다. 같은 직장 내 밴드에서 활동하던 유부남 직원의 어드바이스가 있었는데, 그의 말은 나에게 충분한 명분거리가 되었다.


  "장가가면 아무것도 못 산다. 총각 때 많이 사서 모아 둬"


그렇구나... (장가는 언제 갈지도 모르면서) 이 말을 명분 삼아서 취향 껏 여러 가지 일렉기타와 앰프를 사서 쓰고 되팔고 또 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그 분(현, 배우자)이 나타셨고, 나도 장가를 가게 되었다. 혼자 살때도 짐이 많았는데, 두 사람이 살림을 합치게 되니, 작은 신혼집에 기타에게 줄 자리는 없었다. 1차 처분이 이루어진다. 최소한으로 남기도 다 처분한다. 늦은 장가라 결혼하자 바로 첫째 아이가 생기고 신혼의 단꿈은 커녕 바로 태교로 바로 넘어가면서, 태교 때 뱃속의 첫째에게 노래 불러 줄 때 외에는 기타를 제대로 써 보질 못했다. 나는 기타와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첫째아이가 태어나니 좁은 신혼집에 짐은 더 늘어나고, 나의 기타들은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 간다. 결국 중고나라에 눈물을 머금고 다 처분하고 만다. 그리고 둘째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제법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다시 기타를 사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기타로 노래도 불러주고, 나중에 내 아들들도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한 사전 포섭이 명분이었다. 그렇게 다시 기타가 한 대, 두 대 집에 들어왔다. 어쿠스틱기타 1대, 클래식 기타 1대, 일렉기타 2대. 타자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래도 좀 만져줬는데, 타자기를 시작하면서 역시 찬밥 취급 받는 기타들. 아들 녀석들이 언제 커서 기타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고 다시 짐이 되기 시작했다. 꽤 오랜 기간 해 왔던 취미였는데, 이제 진짜 접는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아쉬움이 계속 속을 흔든다. 그렇지만 솔직히 기타를 치는 시간보다, 타자기를 치는 시간이 지금은 휠씬 행복하다. 그렇다면 더 고민할 필요있겠는가? 과감하게 당근마켓에 기타를 처분한다. 이제 생각해 보니 기타와 장비를 팔아서 모아둔 자금들이 그대로 타자기 구매에 유용한 자금줄이 되었다. 선택은 끝났고, 그 때부터 약 4년을 타자기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기타들아 안녕.  



EP2. 타자기, 다시쓰기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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