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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Aug 25. 2023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1)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자유를 얻었다.

아니, 얻었다고 생각했다.




통금은 저녁 여덟 시. 사실상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오라는 암묵적인 룰이었다. 내가 입학하던 해 당시에는 가장 인기 있는 시트콤인 '거침없이 하이킥'이 방영되고 있었다. 주중 저녁 6시 50분 경이되거든 어김없이 시작하는 이 프로그램을 난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보았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경기도 외곽에 살고 있던 내가 서울 학교까지 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 반을 할애해야 했는데, 매일같이 본방사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성인이 된 내가 그토록 얽매여 살아야만 했던 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이었다.

늦은 저녁부터 여자 혼자 나다니는 것은 위험하다는 어쩌면 고리타분한 한편으론 그 시대 아버지들이 갖고 있던 딸에 대한 보수적인 사고관 때문이었을까, 그로부터 말미암아 탄생한 통금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한 처사임은 분명했다. 내 주변 아무도 그런 통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더구나 직업수명이 짧았던 아버진 자연스레 이른 퇴직을 하게 되었고, 하루에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으니 나의 통금시간을 정확히 체크할 수 있었다. 나는 말 잘 듣는 딸이었으니까 일언반구도 덧붙일 수 없었고 무기력하게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스무 살. 이제 막 어른이 되어 자유를 경험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시작하는 나이. 그때에 나는 부모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사회적 성장의 기회를 완벽히 박탈당했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것도 아니어서 딱히 신입생 환영회니 과MT니 새내기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관심과 열의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완벽히 통제당하는 것에 대한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지식하고, 사고에 유연성을 발휘할 수 없는 고집불통의 사람. 그런 사람 아래에서 학비를 받고 밥을 얻어먹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에 나는 용기가 많이 부족했던 사람이었다.




그나마 하교 후, 엄마와의 산책시간은 우리만의 탈출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엄격한 만큼, 엄마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이미 20년을 넘게 함께 한 아버지에게 반하는 것은 엄마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둘은 그런 점이 너무나 닮아있었다.


엄마와 산책을 할 때면, 자유분방하게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점이 제일 좋았다. 자유롭게 일상을 공유하고, 엄마는 내 생각과 감정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가끔씩 덧붙이는 잔소리가 귀찮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와는 항상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비슷해서 죽이 제법 잘 맞곤 했던 것 같다.


아빠에게 어렵사리 산책을 허락받고서 나가던 그 밤이 떠오른다. 서늘한 달빛의 초연함이 가벼이 느껴지지 않던 그 밤에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이 떠오른다. 낮동안 달궈진 보도블록에서 훅 불어오는 열기에 종아리까지 후끈거리곤 했지만,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비슷한 듯 매일이 달랐던 하루의 일과를 소상히 나누고, 가끔씩 터지는 웃음으로 배를 움켜잡고 한참을 걷질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일찍 와야만 했던 통금에 대한 노여움이 어느덧 가시고, 엄마에 대한 애정으로 끓어 오르곤 했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정말 우리는 친구 그 자체였다.


그런 우리의 가까운 사이가 가끔씩 멀어지고는 했었는데, 그때마다 나의 연애 문제가 걸려있고는 했다. 지나친 통금 속에서도 내가 연애를 할 수 있던 것은 엄마의 노력이 8할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늦는 핑계에 입을 맞춰주고, 아빠가 잠에 들거든 몰래 문을 열어주는 것은 모두 엄마의 노력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고민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어떨 땐 친구보다도 더 깊은 사이가 되어주고는 했다. 그 덕분에 대부분의 연애 상담을 친구대신 엄마에게 하고는 했는데, 부모는 역시 부모인지라 몇 없는 내 연애 상대에 불만이 상당했다. 한창 콩깍지가 껴있던 내게 엄마의 그런 시선은 상당히 불편했고, 우리는 그런 문제로 자주 부딪히고는 했다. 그러면 먼저 화가 난 사람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며칠이 지나서야 엉겁결에 화해를 하고는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덧 난 스물 중반이 되었고, 여전히 나의 연애는 아빠에게 비밀이었다. 서툴렀던 지난 연애에 비한다면 이번 연애는 '사랑'이었다. 동시에 엄마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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