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히 입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그러나 워낙 인간관계가 좁다 보니 입이 무거운 것과 비슷한 성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이 종종 내게 비밀을 털어놓곤 했다.
이건 그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는 저녁에 밥을 먹는데 A에게 전화가 왔다. A는 서울의 한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A는 대학원 선후배들, 교수님과 단체로 어디 연수를 왔다고 말했다. 일정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는 중이라고.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는 술을 워낙 잘 마셔서 어지간해서는 취하지 않는데... 그날도 말은 조리 있게 잘했지만 말과 말 사이가 지나치게 뜨문뜨문 끊겼다. 그래서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아주 오랜만에 대단히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A는 취한 사람 특유의 매너로 대화를 이어갔다. 평소보다 지나치게 감정을 표현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비웃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발랄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조금 지쳤다. 밥을 먹다가 멈춘 지 이십 분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 그만 들어가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A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이미 다들 많이 취했고, 자기는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는 건물에서 한참 떨어진 숲 속에서 통화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풍경을 묘사했다.
사방이 온통 까매. 숲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해. 가슴까지 오는 풀잎들이 숨죽이고 나를 노려보는데 나는 그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보름달이 이렇게 밝은데도 그래. 내 주위에는 전혀 비치지 않는 것 같아. 아, 그래도 달빛이 밝으니 기분은 좋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만히 A의 말을 기다렸다. A는 한참 동안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비관했다.
"대학원에 와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더라고. 평생 연구나 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나까지 차례가 올 것 같지 않아.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둬야 할 것 같아.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는 걱정스럽지 않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뭐든 하겠지. 그렇지만 아쉽기는 하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여자 친구와 상의를 해보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A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A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대학원 후배. 아무래도 여자 친구랑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만난 지 4년이 넘었다. A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지방에 내려갔을 때부터 사귀었으니 장거리 연애만 한지도 3년이 넘었다. 나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금세 헤어질 줄 알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꽤 진지한 만남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어떤 문제든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헤어지다니?
나는 A에게 제대로 잘 생각해본 것인지 물었다.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런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타일렀다. 그러자 A는 취한 사람답지 않게 차분하게 말했다.
"나도 알아. 헤어지면 분명히 후회할 거야."
나는 A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회할 거 같은데 왜 헤어져?"
"글쎄..."
나는 내가 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이 삶을 꾸려나가도 좋을 정도로 잘 맞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은 흔히 만날 수가 없다. 꼭 그런 게 아니라도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가? A는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여전히 좋아해.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그 후배라는 사람이 더 좋은 거야?"
나는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충분히 좋아하면서도, 또 다른 누군가가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A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좋긴 한데, 지금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
"그런데 왜?"
"그러게 말이야."
A는 그러고 나서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아. 난 아마 분명히 후회할 거야. 어쩌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왜 알면서도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우리는 쓸데없는 농담을 몇 개 주고받은 뒤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밥맛이 뚝 떨어져서 그대로 그릇을 치웠다. 설거지를 미뤄놓고 침대에 누워 A의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답답함이 가시지 않아서 동네를 한 바퀴 달렸다. 그래도 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을 맴도는 느낌만 들뿐이었다.
A는 정말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후배를 만났다. 그리고 후배와는 일 년을 만나지 못했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A는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결혼도 했다. 물론 그의 아내는 이 글에는 나오지 않은 사람이다. 최근에는 이사를 했다.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고 한다. 여전히 술은 잘 마시고 여간해서는 자기 힘든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씩, 아주 가끔씩 술에 취하면 내게 전화를 걸어 옛날 얘기를 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속절없이 그때가 떠오르고 만다. 나도 알아. 아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다.
이걸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나도 그런 비밀들을 함께 품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는 말고, 딱 그 정도까지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