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과장님이 조용히 내게 묻는다.
"오늘 특별한 약속 없지?"
"네? 아.... 네."
당했다. 없는 약속이라도 만들어 냈어야 하는데. 퇴근할 생각에 마음이 해이해졌나 보다. 사무실을 쓱 둘러보던 과장님은 다음 타깃을 향해 나아간다. 엑셀 작업을 하느라 바빠 보이는 선배. 역시 방심하다 당했다. 선배가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저녁만 드시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물론 거짓말이라는 걸 우린 잘 안다.
삼겹살집으로 향하면서 선배는 술이 지겹다고 이야기했다. 저번 주에 있었던 거나한 회식 덕에 선배는 장염에 걸렸다. 살이 5kg 나 빠지고 한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번 주는 조용히 넘어갔으면 했는데. 차라리 야근하는 게 나을 것 같단다. 그러면 밀린 일이라도 하니까.
축 처진 우리와 달리 과장님은 술 마실 생각에 신이 나셨다. 일주일에 많게는 두세 번, 밥으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자리. 이 자리는 직장 동료와 친목을 다지는 자리다. 적어도 그들이 생각하기엔 그렇다.
막내인 내가 삼겹살을 구웠다. 태웠다고 한 소리 들은 게 몇 번. 이제 제법 잘 굽는다.
"자 한 잔씩 해야지."
보수적인 분위기에 남자가 대다수인 업계 특성상 술을 많이 마신다. 어느새 소주 5병, 4명이 마신 거니 꽤 많이 먹었다. 그러다 보면 투박한 속 얘기가 나오곤 한다.
"우리 회사는 인마,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가 중요해. 너처럼 술 한잔하자고 해도 빼고 그러면 인마, 아무것도 못해.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아?"
일만 잘하면 왜 안 되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긴 적은 없다. 그저 하는 말이 다 맞다고, 차장님 과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겠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대답하고 지나가는 게 편하다. 어디에선가 읽은 것 같다. 이기지 못할 상대에겐 덤비는 게 아니라고.
어차피 운전해서 가기엔 글렀기에 술잔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뭐 마실 만하다. 술이 술을 먹는다.
선배도 나도 발음이 꼬이기 시작한다. 하긴 꽤 먹었다. 2차 얘기가 나온다. 적당히 좀 먹지. 차장님이 오늘은 여기까지 먹자고 한다. 다행이다.
집으로 가는 길. 선배는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남 일 같지 않다.
다음날 사무실. 어제 잘 들어가셨냐는 아침 인사에 과장님이 이야기하신다.
"어제 경준이 아주 신나서 마시더라! 좀 맞춰주니까 말이야 기분이 좋아가지고! 그냥 하하."
과장님의 말에 불만이 삐죽 솟아오른다.
"아 경준 선배가요? 장염이 심해져서 병원 간다고 하던데요?"
이렇게 말하면 양심의 가책을 좀 느끼려나.
"젊은 놈이 말이야 허약해가지고, 나는 전날 술을 세 병이고 네 병이고 먹어도 회사 와서 티 낸 적이 없어!"
헛된 기대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