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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

by rextoys

인간의 뇌는 자기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 삶의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다. 외부에 추구할 것이 없거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을 때는 뇌 속 DMN 이라는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데, 이 때 자기 내면의 성찰과 삶의 의미에 대한 탐색이 일어난다. 그러나 DMN 활성이 과도하게 장기간 일어나면, 즉 오랫동안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면 그 때부터는 공허와 우울함에 빠져들게 된다.


누구나 인생에서 각자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 그 의미는 대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추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있다. 어릴 때는 자기가 잘하는 것을 찾고 거기서 성취를 하고 그걸로 인정받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시간이 지나면 직업적으로 더 높은 성취를 하고,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또 추구하는 대상은 달라지겠지만,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를 계속 추구하고, 어울릴 사람들을 찾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은 장기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데 그 이유는 모두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빠지면 공허와 허무함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할 무엇인가를 찾게 되는데, 그래야 의욕을 얻고 생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것에 의미를 둘 것인지는, 스스로만이 찾아낼 수 있다. 남과 같은 것에서 의미를 찾기는 어려운데,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르게 태어나 다른 삶을 경험하며 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의미는 자기 유전자의 욕망에서 비롯되어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고유한 것들이기 때문에, 나와 내 옆의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이 다를 수 있다.


누구는 예술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공유할 것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둘이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도록 다르게 타고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둘은 서로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우므로, 상대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완전히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사랑이든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것이든,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든 사회적 명예와 인정을 얻는 것이든 혹은 그 중 몇 가지든 추구할 삶의 의미가 없어지면 공허와 권태에 빠질 수 있다. 늘그막 노인들이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하루하루 그저 즐거운 것에 초점을 맞춰 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은 들을 필요가 없는게, 사람의 뇌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현재에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미 젊은 시절에 수많은 의미들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 죽음이 가까워지면 해탈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는 뇌의 노화와도 관련이 깊다. 다만 최근에는 이상할 정도로 삶의 허무주의가 퍼지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의 결과가 아니라 포기와 회피에 가깝다. 특히 젊은 층에서 미래를 속단해서 일찍부터 좌절하고 삶의 의미보다는 하루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최고라는 공허한 외침 속에 그다지 만족스럽지도 않은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자신이 삶의 의미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실은 자신도 추구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다 얻지 못했을 경우의 상처가 두려워 일찍부터 해탈한 척하는 것은 아닌지..


자기 삶의 의미는 이미 자기 자신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다.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시절부터 스스로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의미를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때마다 혼이 나거나 제재를 당해 상처를 입어서다. 자기 삶의 의미는 스스로의 깊은 욕구, 욕망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반드시 주위 사람들 혹은 사회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의미를 떠오를 수 없게 억제해 버린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끝까지 그것을 인지한 채 인생 전반에 걸쳐 고도의 집중력으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삶을 보낸다. 실은 어느 쪽이 더 맞는가에 대한 답 같은 것은 없고 그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비슷한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찾아 어울리는 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족, 어린 시절의 또래 집단, 대학 동기, 종교 등과 깊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족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와 같은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이유는 없다. 특히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지향점이 무척 다를 수 있다. 긴 인생을 살아온 부모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단순히 세상이 어떤 곳인지 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런데 알고보면 부모 역시 그 나이 때는 똑같은 것을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유전자를 공유하므로) 사회에서 좌절된 경험이 있는 경우 비슷한 기대를 가진 아이를 나무라고 좌절시킨다. 이렇게 일찍부터 자신의 마음 속 진실된 가치를 추구해 보는 경험이 좌절된 아이들은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믿고 사회에 무작정 자신을 맞추려 애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자신과 가치나 삶의 의미를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런 집단에 자신을 맞추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삶의 의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어떤 학문에 깊은 가치를 느낀다면, 반드시 그 학문에 똑같이 가치를 느끼는 학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실은 세상의 모든 학문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다. 각각의 학문은 그 학문이 반드시 필요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의해 공유되면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지금은 AI와 관련된 학문이 인기를 얻고 있지만, 불과 10여년 전까지 AI 학문은 다수 학계에서 별다른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분야였다. 인문학의 위기라 해서 현재 인문학의 많은 분야들이 사장될 위기에 처해 있는데, 만약 인문학의 몇몇 분야 공동체에 더이상 사람들이 진입하지 않고 새로운 연구 업적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 해당 분야는 명맥이 끊겨 사라지게 된다.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과거 중세시대 수많은 유럽의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렸지만 지금 시대에 초상화 그리기를 예술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현대 예술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그냥 그 쪽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위기도 같은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생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이 꼭 다수가 보기에 그럴듯하거나 세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치인들에게 삶의 의미는 권력욕이다. 그들의 추구하는 권력욕은 한편으로 매우 탐욕적으로 보이지만, 그걸 두고 남들이 비난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추구할 것이 무엇인지 오히려 뚜렷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하다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억제하고 삶에는 원래 의미가 없는 거라는 쿨병 환자들보다는 낫다. 생물학적 근거를 들며 인생엔 의미가 없다고, 그저 나는 던져진 존재라고 하지만, 오히려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에서 가장 강력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자기에게 진실한, 가족과 친척 친구를 비롯한 누구의 비난과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인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함께 공유할 공동체를 찾는 것, 이것이 지금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남은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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