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진 건 별로 없다.

by 치의약사 PENBLADE

어떤 현상에 의문과 호기심을 갖고 들이 파는 것 역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관심을 갖는 대상은 '나' 라는 주체의 생물학적인 생존과 유전적 번영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다만 여기서 '어떤 관련' 이라는 것은 '나' 라는 주체의 몸과 마음이 판단을 내린 거라 현실적인 면에서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이는 나라는 주체의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와 그 발현 요소가 시대와 잘 안맞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서 발현 요소란, 특정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어린시절의 환경 등 여러 요소에 의해 발현 정도가 조절되는 몸의 특성을 의미한다.


당분과 지방 등 에너지 함량이 높고 효율적인 성분을 많이 함유한 음식에 대한 과도한 탐닉은 과거처럼 식량이 부족한 시대에는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이른 나이부터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불리한 유전적 특성이 되었다. 불안과 우울을 쉽게 일으키는 요소는 과거 흑사병 시대처럼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엔 오히려 에너지가 넘쳐서 여러 활동을 하는 사람들보다 생존과 번영에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의료가 발달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지금의 시대엔 오히려 쓸모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때론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쉽게 비만해지고, 당분과 지방을 탐닉하는 유전인자를 타고난 사람들은 현 시대를 잘 살기 위해 비만약과 같은 보조제를 사용하거나 의도적으로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멀리하기, 식단 관리, 기운 내서 틈틈히 운동하기 등의 일상 루틴을 평생 실천하는 것이 권장된다. 마찬가지로 쉽게 우울이나 불안에 빠지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은 가급적 과한 자극이나 복잡한 인간관계,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필요시 약을 복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과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던 시절, 수많은 원주민들이 유럽 대륙에서 옮겨온 천연두와 같은 병균으로 집단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시절 항바이러스제나 바이러스 예방주사, 항생제 등이 개발되어 원주민들에게 보급되었다면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 후손들의 유전자 구성은 꽤 달라졌을수도 있다. 적자 생존의 원리는 인류사 내내 수많은 사람들을 냉혹하게 자연 도태시켰고, 지금처럼 발전된 시대가 되어도 그러한 도태 프로세스는 중단되지 않았다. 전세계 특히 아시아에서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진화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 도태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지는,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한 곳이며, 한 명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온전히 생물체로서의 역할을 다 하며 사는 것도 시대 흐름을 잘 타고난 경우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의료가 발전하기 전, 영아 사망률은 50%가 넘었다는 통계가 많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현상이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들을 생존시켜 인류 전체의 지속적 번영과 진화에 있어서도 이득이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아이들이 이른 시기에 예방접종을 받으며, 조금만 몸 상태가 안좋아도 의료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제 의료적 처치는 생존을 위한 필수 항목에 속하는데, 그것은 과거였으면 이른 시기에 운명을 달리했을 사람들도 모두 살아남아 성인이 되고 중년, 노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이런저런 지병을 하나 둘씩 달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데, 한편으로 이는 그만큼 의료의 혜택 덕분에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쉽게 우울하거나 불안해지는 사람들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인생이 쉽지 않은 성향을 갖고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선 의료적 혜택이나 이런저런 의도적인 노력이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과거에도 쉽게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성향은 주류적인 삶을 살기 어려웠으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작고 소박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울과 불안은 고쳐야 할 질병이라는 관점보다는, 과거 어느 때엔 생존과 후손을 남기는데 어느정도 장점이 있었지만 현시대엔 그 장점의 요소가 사라져버리고 있는 그런 성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많은 종교적 의례나 공동체 모임, 각 종교가 추구하는 교리의 구조에는 은근히 불안과 우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원리가 녹아 있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애초부터 종교의 탄생에 그런 수요도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불교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 할 것 없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신뢰를 쌓아온 종교는 그 수행 방식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띈다. 식단을 제한한다든가, 믿음을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절제된 의례가 있다든가 세상의 수많은 자극적인 유혹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리한다든가 등등. 그런 수행들은 겉으로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실한 마음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뇌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예민하고 취약한 신경 구조를 보호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데 최적화된 실천 지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역설적으로 쉽게 불안과 우울해질 수 있는 성향의 사람들이 오히려 살아있다고 느끼는 상황은, 평화로운 시대 상황이 아닐 수 있다. 낙후된 환경, 목숨이 위협을 받는 전쟁 상황, 눈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이 오히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일깨우고 비로소 의지를 북돋울 수 있다는 의미다. 굉장히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지금 시대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 즉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안과 우울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인과관계를 뒤집어 보자는 소리다.


굳이 전쟁터에 뛰어들어 실시간 전쟁 상황을 전세계에 알리는 종군기자, 고생하면서 가난한 국가에 가서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의료인들과 봉사자들, 험난한 지역에 굳이 선교하러 가는 선교사들, 그 외 여러가지 '굳이 안해도 되는 위험하고 힘든 일을 골라 하는' 사람들.. 그들이 과연 그 누구보다 더 선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류애가 넘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그런 관점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쓸모 있는 상황에 가서 자기 역할을 하는 데에서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어떤 사람은 더 발전된 기술을 위해 노력하고, 또 어떤 사람은 더 훌륭한 요리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어떤 이는 더 나은 경제와 정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남들보다 더 고귀한 품성 덕분이 아닌 그저 자기에게 타고난 주어진 일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듯, 그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과거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전염병이 만연하고 시도 때도 없이 크고 작은 전투가 발생하고 도적과 강도로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 쉽게 우울하고 불안해지던 사람들이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기에 목숨을 보존했다는 가설은 - 그렇게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기에 무시할 수 있는 없겠지만, 조금 앞뒤가 안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뚜렷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즉, 오히려 풍요롭고 안전한 시대가 되어서 자신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불안과 우울에 빠졌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좀 헷갈리기 쉬운데, 불안 / 우울에 쉽게 빠지는 '어떤 성향' 이 바로 이들의 존재감 혹은 능력과 직결되는 특성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어떤 성향이 바로 남들보다 예민하거나 금새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능력이고, 그런 것에 과도한 에너지를 쓰게 될 경우 신경세포가 지쳐 불안 / 우울에 빠지게 된다는 논리다. 과거처럼 자극이 덜하면서 생존을 위협하는 눈 앞의 문제에만 신경을 써야 했던 시절 - 당장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상황, 눈 앞에서 번져가는 전염병, 적군의 침입으로 당장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 - 에는 여러 자극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이 당장 눈 앞의 심각한 문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예민하지만 취약한 신경세포의 네트워크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면서 비로소 진정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다지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없으면서 사방에서 온갖 정보와 자극이 넘치는 자극 과잉 시대엔 스스로의 쓸모를 입증할 기회도 없거니와 과도한 자극으로 가만히 있어도 신경세포들이 피로해지게 된다. 그래서 불안과 우울을 상시적으로 느끼며 더더욱 웅크려들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와 관련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은, 불안과 우울이 단순히 치료해야 할 병적 상태가 아니라는 느낌을 자주 느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발전된 현대 사회에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반대로 더 힘들고 더 위험하고 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들을 돕는데 헌신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신의 자원을 초집중할 때 비로소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 탐구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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